흰 머리카락
나에겐 또래의 다른 사람들보다는 머리카락의 백화 현상이 좀 느리게 나타났다. 젊어서부터 염색을 해야 했던 친구들의 말에 의하면 그것도 큰 복이라고 한다. 복에 겨워서인지 난 그 복 말고... 건강 복, 남자 복, 돈 복... 뭐 그런 게 더 좋은데. 하! 하!
이렇게 복 받은 나는 갈색 머리카락 사이로 흰 머리카락 한두 개가 드러나는 것이 무척 생소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그래서 얼마 전 까지만 해도 흰 머리카락이 눈에 보이기만 하면 가능한 한 뽑아내곤 하였다. 노모의 잔소리를 들어가면서 말이다. 엄마는 자신의 머리숱이 적다고 늘 신경 쓰시던 분이시라 내가 흰 머리카락을 뽑아내거나 뽑아 달라고 하면 아깝게 그건 왜 뽑느냐고 한소리 하곤 하셨다. 그러나 메뚜기도 한 철이라고, 흰 머리카락 뽑아내는 것도 한 시절이다. 이제는 거울 앞에 서도 백발과 흑발이 구별되지 않아 눈에 거슬리지도 않는다. 노안으로 많이 진행되기 전에는 거울 속에 흰 머리카락이 왜 그렇게 튀어 보이던지 모를 일이다.
요즘은 돋보기를 쓰지 않으면 검은 머리카락과 흰 머리카락의 구별이 어렵다. 노화와 함께 무엇인가를 구별해 낼 수 있는 능력이 사라지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시력뿐 아니라 지적인 능력도 마찬가지리라. 언젠가는 옳고 그름, 밝음과 어둠, 사랑과 미움, 좋고 싫고의 구별이 불분명해지는 때가 오리라. 아니 구별이 가능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구별할 필요가 없는 때도 오리라. 인생의 모든 것들이 경계가 허술하여지는 때... 아니 경계를 넘나들며 까탈을 부리지 않게 되는 때... 하지만 그때가 다가오는 것이 두렵기도 하다.
이젠 보이는 흰 머리카락을 모두 뽑아버리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결론지으면 마음이 달라진다. 백발은 지혜의 면류관이라는 잠언의 말씀이 아니어도, 애정을 가지고 보니 흰 머리카락에 대한 연민의 정이 싹트기 시작한다. 늙는다는 것을 가슴으로 받아들일 준비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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