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ct&Fiction/아버지를위한노래

1-09) 안치실에서 영안실로

truehjh 2011. 9. 19. 23:17

 

1998.10.15~. 안치실에서 영안실로


앰브란스는 아버지를 안치실로 모셨다.

그 곳의 안내자는 아버지 얼굴을 가리고 있던 하얀 천을 벗겨주면서 마지막 볼 사람은 보라고 하였다. 나는 무릎을 굽히고 아버지 얼굴을 찬찬히 보았다. 아버지의 얼굴은 평화로운 아이의 얼굴 같았다. 하얗고 준수한 얼굴에 눈을 초승달처럼 조금 뜨고 계셨다. 오빠가 감겨드렸다는 눈이 완전히 감겨지지 않았나 보다.


아버지의 눈은 나를 보고 계셨다. 아니 나를 보고 계시는 아버지의 눈을 보았다. 나를 보시려고 눈을 다 감지 않으신 것 같았다. 그렇게 조금이나마 뜨고 계신 눈 때문에 얼음장 같이 차가운 설움으로 가득했던 내 마음이 녹아 내렸다. 임종을 하지 못했다는 설움은 그냥 버려진 것 같은 기막힌 소외감이었고,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아픔의 배신감이었는데, 나를 보기 위해 눈을 완전히 감지 않고 기다리고 계셨던 것 같아 안도감이 느껴졌다. 나는 소리를 삼키며 가슴으로 가슴으로 울었다.


나를 위해 다 감지 않으신 눈이 너무 그윽하고 다정스러웠다. 죽은 자의 눈이 아니었다. 소리되어 나오는 울음을 참으며 속으로 삼키는 울음이 가슴에서 맴돌다가 흐느낌이 되어 가슴을 찢으며 밖으로 새어 나온다. 두 손으로 아버지 얼굴을 쓰다듬으며 그렇게 서럽게 울었다. 아버지 얼굴은 아직도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15일 새벽 두 시의 안치실에서 있었던 평생 잊지 못할 아버지와의 만남이었다.

그 분은 그렇게 살아 계신 듯 나를 맞아 주셨다. 사랑하는 아버지...

안치실에서 아버지의 얼굴을 감싸 안고 울었던 울음이 내 생애에서 가장 슬픈 울음이 될 것이다. 나의 눈물은 무엇을 적시었나... 소외감도 아니고 배신감도 아니다. 그것은 분리임과 동시에 통합이며 또한 슬픔이다. 쏟아지는 눈물은 그것을 표현하는 방법으로 너무 미약했다.


아버지를 안치실에 모셔 놓고 여러 가지 절차에 관해서 병원사람들과 의논했다. 숨이 막히고 정신이 혼돈스런 막간의 시간을 보내다가 우리는 오빠 집으로 다시 갔다. 여러 가지 필요한 물건들을 챙겼다. 아버지의 사진, 쓰고 계셨던 안경, 항상 읽으시던 성경책을 찾아 놓고... 주소록, 세면도구들과 옷들을 준비하여 주저앉을 듯한 엄마를 모시고 영안실로 다시 왔다. 나는 그 와중에 아버지의 작은 주머니성경책을 찾아 따로 챙겨 내 가방 속에 넣었다.


모든 절차는 너무도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아들들과 사위의 역할은 막대했다.

장례절차에서도 여자들의 위치는 주방이 주무대일 뿐이었다.

나는 울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임종하신 아버지의 자애로운 얼굴을 보며 그렇게 울었으면 되었지... 이제 ‘제설움’ 때문에 운다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눈물이 나왔다. 시시때때로 슬픔의 감정이 복받쳐 오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오전엔 번갈아 가며 전화에 매달려 있어야 했다. 미쳐 연락하지 못한 이들에게 알리기 위해서였다. 90세가 넘으신 외조부님 부터 친척들, 친지들, 용천노회 사람들, 옛날 제일교회 식구들...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가 흩어지곤 했다. 시아버지를 모시고 삼성병원에 들렸던 은자도 찾아왔다. 난 누구라도 붙들고 오랜 이야기를 하고 싶었지만 그럴 상황이 아니었다. 兄도 왔었다. 그는 아직도 반항기가 다분한 20대 초반의 기운으로 삶을 응시하고 있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한 목사님은 제가 기억하고 있는 단 한 분의 목사님이십니다.” 그 소리만 내 귀에 전달되어 왔다. 겨자씨 회원들도 거의 다 왔었다. 불편한 몸을 이끌고 모두 모여 주었다.


그날 밤 엄마는 허탈상태가 되면서 온 몸에 경련이 일어나 의정부 아들집으로 모시고 갔고 임신 초기인 작은 올케가 엄마를 맞이했다.

나는 새벽에 성인 집에 가서 잠시 잠을 잤다. 성인이가 고마웠다.


다음 날 오전에 영안실로 오신 엄마는 힘을 가누지 못하는 상태가 되었다.

그 상황에서 응급실로 갈 수는 없어 성인 집으로 모시고 가 영양주사를 맞게 해 드렸다.

엄마는 주사를 맞으면서 우셨다.

아버지 죽음 이후 처음 보이는 엄마의 눈물이었다.

“내가 너무 못해드린 것 같애...”

그렇다. 남은 자는 언제나 그러한 생각으로 스스로를 고문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렇게라도 자학하지 않으면 어떻게 그 슬픔의 시간들을 지나갈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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