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리는 훈련을
버리는 훈련을 하자. 계속 이 주제를 붙잡은 채로 시간을 보내고 있다. 버려야 마음과 공간의 여유가 생길 것 같은데, 막상 버리려고 하니 처음에는 무엇부터 해야 할지 잘 생각이 나지 않았다. 주변의 잡다한 물건들을 둘러보고서 가장 가까이에 있는 책장 서랍을 열어보았다. 몇 개의 작은 상자들이 포개어져 있어서 내용물은 알 수가 없었다. 그중에 가장 오래돼 보이는 상자 하나를 꺼냈다. 그 속에는 20여 년 전 미국으로 갈 때 마련해 두었던 작은 선물들이 예쁜 색동지에 포장된 채로 남아있었다. 책장을 정리할 때마다 차마 버리지 못하고 남겨두었던 물건들이다. 그 당시만 해도 고마운 누군가에게 주려고 준비해 갔던 마음의 선물들이었는데 아직도 제 주인을 찾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면 포기하는 것이 맞다.
오늘은 용기를 내어 모두 버렸다. 아니 그중의 1/10 정도는 버리지 못하고 다시 옆 상자에 옮겨 넣었다. 이리도 마음이 약해져서야 어떻게 오랜 세월 함께 했던 물건들과 이별을 해 낼 수 있을지 모르겠다. 과거의 인연들에 대하여 쉽게 떨쳐버리지 못하는 성격이나 습성을 탓해 볼까. 물론 과거에 대한 집착은 아니다. 소박하게 핑계를 대자면 그 시절에 대한 애달픔이라고나 할까. 그렇다. 애달픔. 그것으로 족하다. 과거에 대한 향수가 더 이상의 미련을 불러오지 못하는 나이가 되었으니, 쓸모가 없고 아쉬움도 남아있지 않은 과거의 물건들을 찾아 천천히 버려도 될 것 같다. 없어도 그만인 물건들뿐만이 아니다. 이유 없는 고집도 내려놓고, 이루지 못할 계획도 포기해 버려야 한다.
버리는 것을 실천하기만 하면 된다. 실천은 훈련으로 이어질 것이다. 그러나 나는 뭐든지 금방 행동으로 옮기는 성격이 못된다. 천천히 생각하고 또 생각하면서 자연스럽게 변화를 시도하는 편이다. 내 것이 될 수 없는 것들은 언젠가도 내 것이 될 수 없다는 사고방식을 가지고 살고 있는 나에게 속전속결이란 찾아볼 수 없는 행동양식이었다. 인생의 길에서 만나는 많은 것들이 내 힘으로 가부가 결정되지 않는다는 피동적 사고의 패턴이 내 안에 충만하게 자리 잡고 있어서일 것이다. 고집이라는 표현보다는 ‘수동적인 느낌의 결심’ 같은 것이다. 될 것은 언젠가는 될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버리는 훈련을 지속해야 한다. 훈련은 시간의 문제이니 초조해하거나 서두를 필요는 없다. 기다리는 인내가 필요하다.
버리고, 내려놓고, 포기하는 훈련이 끝나면 나는 좀 달라질까. 덜어내고, 간단화하고, 최소화하고 나면 짐이 좀 가벼워질까. 지금 가지고 있다고 여겨지는 것들을 다 버리고 나면 좀 비워질까. 그 후에는 무엇이 남을까가 궁금하다. 본연의 내가 누구인지를 알 수 있는 뭔가가 과연 찾아질까. 가능할까. 수시로 이렇게 의심하면서도 버리고, 내려놓고, 포기하기로 마음먹는 순간에는 자유가 느껴진다. 공허할 줄 알았는데 그렇지가 않다. 이래도 좋고 저래도 괜찮은 상황이라고나 생각하니 자유롭다. 버리는 훈련은 비우고 그 자리에 새로운 것을 채우려는 것이 아니다. 새로운 채움이 아니고 비움이 목적이다. 지금까지 만들어진 나 자신에게서 가장 중요한 것이 드러날 때까지 버리는 것이다.
내가 간절히 원하는 것과 연결되지 않으면 아예 보려고도 하지 않던 습성을 버리고, 그것에 매달려 있던 고집을 포기하고 나면 삶이 간단해질 것 같다. 머릿속을 말끔하게 해 줄 한두 가지 정도가 남으면 된다. 그리고 그것이 소소한 일상에 감사하며 사는 마음이었으면 좋겠다. 감사하는 마음이 있어야 비로소 소소한 일상의 행복을 즐기며, 살아있는 생명을 소중히 여기며, 손익계산 없이 진심으로 인간을 사랑하며, 미풍에 흔들리는 나뭇잎의 파장에서 의미를 찾으며 살 수 있는 것이다.
'Biography > 장년시대(2008~2019)' 카테고리의 다른 글
e시니어진입기 - 어른으로 (0) | 2014.07.04 |
---|---|
순례의 길 (0) | 2014.07.02 |
e시니어진입기 - 소박한 위로라도 (0) | 2014.02.05 |
e시니어진입기 - 59세...아직은... (0) | 2014.01.12 |
e시니어진입기 - 지금 나는 안녕한가 (0) | 2013.12.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