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의 길 (2014)
거리 노숙인의 시간축은 철저히 ‘현재’를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시간개념이나 공간개념이 다르다고 한다. 난 최근 과거와 미래와 현재가 관련이 없는, 아니 과거와 미래가 없고 현재만 있는 삶을 살고 있는 것 같다. 정리되지 않은 짐들을 끌어안고 잠잘 곳을 찾고 있는 노숙인이 되어 있는 느낌이랄까. 이러한 나의 삶은 현재 필요한 것들만 가지고 길 위를 걸어가는 순례자의 삶과는 거리가 있다. 순례의 길에는 떠나온 과거의 시간이 있고, 최선을 다 해야 하는 현재의 시간이 있고, 도달해야 할 미래의 시간이 있다. 또한 순례의 길은 본향을 향해 걸으면서 과거에 매여 있거나,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 현재의 짐을 무겁게 만들지 않는다.
지금까지 나는 너무나 많은 선택의 기로에서 새로운 것들을 시도하며 살아 왔다. 어떤 면에서는 마치 거리의 노숙인과 다름없이 살고 있는 내 모습이다. 꿈을 꿀 수 없었던 그래서 좌절 속에서 늘 차선을 선택해야만 했던 청년기를 지나고, 장애와 연관되지 않는 일 즉 장애가 가로막지 못하는 일을 하고 싶어서 기독교교육학을 공부하겠다거나, 미국에 가서 살아보겠다거나, 장애인인권운동에 나서보겠다거나, 출판선교의 길을 가보겠다고 했지만 모두 만만치 않았다. 그리고 다시 최근 몇 년 간 약사면허를 사용해서 취업도 해 보고, 교회 의료선교에 참여도 하고, 아이들 가르치는 일도 하고, 글쓰기, 그림 등등에 관심은 가지면서 열심히 살고 있는 듯 하게 살았다. 물론 그러는 동안에 몸이 점점 노쇠해져서 갱년기 이후 50대 후반부터 몸이 말을 듣지 않기 시작했다. 최근에는 여기저기 고장난 몸을 보살피기 위해 수영장에 가서 운동을 하며, 경제적 부담감의 돌파구로 플로라 운영에 관여하고 있지만 그것 또한 내가 집착하거나 전념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내 삶 속에서 다양한 방향으로 분산되던 에너지를 한 곳으로만 집중할 수 있었다면 지금 나는 어떤 결과물을 얻었을까 가끔 궁금해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게 살아온 것이 나이며, 집중되지 않은 삶은 살아온 삶이 나의 삶이기 때문에 지나온 시간들을 후회하고 싶지는 않다. 물론 이제 앞으로도 그렇게 살겠다거나 그렇게 살 수밖에 없다거나 하는 핑계를 대고 싶지도 않다. 단지 내 삶에 있어서 더 이상의 새로운 시도나 선택을 취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생각이 요즘 나를 지배하고 있다. 지금을 살고 있는 나의 짐을 가볍게 하기 위해서는 오히려 지난 세월동안에 선택하고 시도했던 많은 것들을 버리며 살아야겠다는 생각이다. 그런 의미에서 올 한해는 버리는 해로 삼았다. 그리고 하나씩 하나씩 버리는 도중에 있다.
이렇게 버리는 훈련이 끝나고 새로운 60대가 되면... 덜어내고, 간단화하고, 최소화하고 나면, 그러면 그 후에는 찾아질까... 지금 가지고 있다고 여겨지는 것들을 다 버리고 나면 가능할까... 어떻게 해야 이런 연역적 추론을 가능하게 할 수 있을까... 순례자의 길 위에서... 어디에 흩어져 있는지도 모르는 오래된 꿈과 관심과 녹슨 재주들을 하나씩 찾아내어 다 버리면, 버려야 할 것들을 다 버리면, 한 두 가지가 남을 때 까지 다 버리면, 아니 한 두 가지를 남겨 주신다면 과연 그것이 무엇일까. 그것이 하나님사랑 이웃사랑의 길일 수 있을까. 그렇게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나이에 맞게 살면 되! 이렇게 나를 세뇌해도 포기는커녕 점점 더 간절해지는 그 어떤 것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일이며 노동이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일... 하나님 사랑을 이웃과 함께 실천할 수 있는 일... 좋은 사람들과 만나 삶을 나누는 일이 너무도 절실하다. 그런 노동을 하고 싶다. 생계를 유지하는데 필요한 노동이 아니고 내 삶과 맞닿아 있어서 결코 분리될 수 없는 노동, 내 삶의 주소가 될 수 있는 그러한 노동을 하면서 살 수 있었으면 참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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