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ct&Fiction/장년시대(2005~2014)

e시니어진입기(11) - 소박한 위로라도

truehjh 2014. 2. 5. 13:19

소박한 위로를

 

무선주전자에 남아 있는 물의 양을 확인하고는 스위치를 눌렀다. 잠시 후에 방의 정적을 깨면서 물 데워지는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마음속에 가라앉아 있던 온갖 상념들도 커피물 끓는 소리와 함께 보글보글 부글부글 아우성치며 올라온다. 되어야 하는 나, 또는 되고 싶은 나가 아니고 현재 있는 그대로의 자연스런 나는 어떤 모습일지 궁금하다. 계속 새롭게 만들어져야 하는 내 모습이 허무한 지금을 끊임없이 낳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어떤 목표지점으로 만들어져 가야 할 나의 모습이 아닌, 지금 이미 만들어져 있는 나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 내 안에 나는 어떤 모습일까. 지금의 나로 살다가 죽어야 하지 않을까. 현재의 내 모습을 즐기고 살 수는 없을까.

 

나는 삶에서 무엇을 원하고 무엇을 기뻐하는가. 아직도 나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깊이 생각하기조차 벅차다. 하지만 지금 당장 이 순간에 원하고 기뻐하는 것을 찾기는 쉽다. 바로 고소하고 달콤한 커피다. 한 잔의 커피가 나를 위로해 줄 것만 같다. 소박한 위로다. 상기되는 기분을 가라앉히노라면 다 끓었다는 신호음이 상쾌하게 들리고, 끓어오르던 물은 다시 잠잠해진다. 투박한 머그잔에 믹스커피 한 봉지를 털어 넣고 뜨거운 물을 붓는다. 그리고 작은 스푼으로 한두 번 저어 준다. 연한 커피 향이 코를 간지럽히지만 몇 번의 숨을 고른 후에 천천히 한 모금을 마신다. 소리 없는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열기가 가시기 전 바로 그 몇 모금의 느낌이 믹스커피 맛의 진수다.

 

또 한 모금의 커피를 마시며 책상 앞에 앉아서 프리지어 꽃그림을 바라보았다. 프리지어의 노란색 꽃망울에는 백색의 결백함 같으면서도 연두색의 충만함이 있어 아름답기도 하지만 그 향기 또한 일품이다. 프리지어 꽃향기 속에는 부드럽게 감싸주는 것 같으면서도 싸하게 아린 자극이 있고, 머무르는 것 같으면서도 굽이도는 흐름이 있다. 단 한줄기 꽃에서 피어난 향기가 주위의 공간을 가득 메우고 또 멀리 퍼져 나간다. 나는 프리지어 꽃향기 같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과거로 회귀하는 것을 별로 즐겨하지 않는 나지만 달콤 쌉싸름한 커피 맛에 취해서인지 60세의 나이를 향해 가고 있는 짧지 않은 지난 삶을 뒤돌아보게 된다. ‘커피 때문이야... 아니... 프리지어 꽃향기에 대한 추억 때문이야... 아니다... 창문을 통해 이 방 깊숙이 들어오고 있는 따스한 저 햇살 때문이야...’ 맞다. 따스한 봄날 정오의 햇살을 얼마나 더 맞이할 수 있을까라는 어쭙잖은 감상 때문인 것이 분명하다.

 

식어버린 커피잔에는 아직 몇 모금의 커피가 남아 있다. 그 남은 커피를 홀짝 마셔버리기가 못내 아쉬워 들었던 잔을 다시 내려놓고는 혼자 씨익 웃었다. 도대체 무엇이 아쉽다는 것인가? 아직도 몇 모금 남아 있는 커피가 아니고, 바로 나에게 남은 시간들에 대한 아쉬움이다. 남아 있는 시간들을 어떻게 보내야 하나.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은 시간들이 아쉽기만 하다. 많은 시간이 남아있다고 여겨졌던 이전에는 무단히 앞으로 나아가려고 애를 쓰며 살았던 것 같다. 그런데 앞으로는 더 이상 나아갈 수 없을 것 같다. 내 육체의 건강이 그 한계를 넘어서고 있는 것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매사에 감사하며 주변의 사람, 자연과 친밀하게 지낼 수 있도록 노력하고, 연습하고, 훈련하는 것이 나에게도 필요하다. 이제부터는 약해지는 건강을 자꾸 탓하지 말고, 우울하다는 감정에 매몰되지 말고, 꾸준히 몸을 움직이면서 의미 있는 작업에 몰두하고, 이웃에 대한 배려와 함께 작은 것에도 기쁨을 느끼고 나눌 수 있는, 그러한 투명하고 단순한 삶을 위해 순간순간 노력해야겠다는 다짐을 해본다. 그리고는 마지막 남아있는 식은 커피를 마저 마셨다. 입안을 맴도는 커피 한 모금은 나의 체온에 의해 다시 따뜻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