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ct&Fiction/장년시대(2005~2014)

e시니어진입기(09) - 지금 나는 안녕한가

truehjh 2013. 12. 18. 22:42

나는 지금 안녕한가

 

마구 달려가다가 멈추면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 헷갈릴 때가 가끔 있었다. 그때는 무지개 같은 꿈을 찾아 달리는데 최선을 다하던 시기였다. 요즘에는 달리기는커녕 슬슬 걷다가 걸음을 멈추었을 뿐인데도 어디로 가고 있는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 생각이 나지 않는 순간이 있다. 지금이 그렇다. 몇 주 동안 중학생인 조카의 기말고사 준비를 돕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어제 시험이 끝났는데, 당장 오늘부터 무엇을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바로 몇 주 전의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뿐인데도 남는 시간에 무엇을 했었는지 기억이 안 난다. 그냥 막막하다. 그 많은 시간들에 분명히 뭔가를 했었는데 갑자기 할 일이 아무것도 없었던 것처럼 느껴진다. 얼마 전부터 시작된 증상이니 나이 핑계나 대볼까.

 

조카 이야기가 나온 김에 한마디 더 보태고 가려한다. 몇 주 전에 조카가 다니는 중학교에 가서 한 시간 동안 수업을 진행했다. 교육기부의 일종으로 미래 진출을 위한 직업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에 참여한 것이다. 나는 약사라는 직업의 전망과 자격과 준비과정을 소개했다. 파릇파릇한 아이들, 초롱초롱한 아이들의 눈빛과 마주하면서 행복감을 느꼈다. 다른 한편으로는 미안한 마음도 생겼다. 그들의 미래를 보여주는 모범적인 시민으로 잘 살아가고 있는가, 어렸을 적에 상상하곤 하던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가고 있는가를 스스로 질문해 볼 수밖에 없었다. 미래를 꿈꾸고 있는 학생들에게, 아이들에게, 젊은이들에게 들려주고픈 이야기가 참 많았지만, 현재 나의 위치에서 미래에 대한 희망을 자신 있게 던져주지 못해 조금 아쉬웠다.

 

요즈음 사회적 이슈가 되고 있는 대학가의 대자보 현상을 보면서도 마찬가지 감정이다. ‘나는 지금 안녕한가?’라는 질문에 자신 있게 대답할 수가 없다. 장년의 그룹에 있기도 어색하고, 노인의 그룹에 끼기도 어려운 나이 58... 50대 막바지에 이르러있는 나는, 지금 잘 살아가고 있는가? 아닌 것 같다. 잘 살아왔는가? 그것도 아닌 것 같다. 잘 살아갈 수 있을까? 그것도 또한 아닌 것 같다. 그렇다면 다시 질문을 바꿔보자. 안녕하냐고 묻고 있는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떤 사람인가? 나는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 나는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가? 나는 과연 무엇을 향해 가고 있는 것인가? 쏟아지는 자문들이 갑자기 나를 어설픈 사색가로 만들어 놓을까 봐 조심스럽고, 궤변가로 남겨 놓을까 봐 조바심 난다.

 

최근 2~3년간은 건강 이외에는 챙긴 것이 없을 정도로 정말 목표점 없이 지냈다. 경제활동과 신앙생활에 필요한 활동은 습관처럼 이어졌지만 삶의 목표점이 없었으니 당연히 목표를 향한 투자도 없었다. 그 결과로 현재 내 삶의 정체성, 그리고 나의 정체성이 모호해지고 말았다. 이전에 그토록 심혈을 기울여 추구하던 일들은 온데간데없고 늙어가는 일만 남아있는 것 같다. 나라는 존재가 타고 남은 재 같이 스러져가고 있다는 생각에 정신이 번쩍 든다. 단지 세월의 흐름에 따른 건강 약화와 노쇠에 대한 걱정만 하고 있는 ’, 소명이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아니고 육신의 건강에 대한 고민만 하고 있는 ’, 그저 지금에 만족하며 감사하여야 한다고 스스로를 세뇌시키며 억지를 부리고 있는 말이다.

 

너무나 단순하게 펼쳐지고 있는 내 삶이 도통 재미가 없다. 살아온 날들에 비추어보면 미래가 어느 정도 규정되어 있어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예측이 된다. 더 이상 새로운 날을 기대하지도 않고, 더 이상 무모한 변화를 시도하지도 않고, 더 이상 내일을 꿈꾸지도 않는다. 꿈을 꾸려한다는 것이 오히려 두렵다. 달려가다가 도중에 멈춰 서게 될까 봐 두렵다. 아니 작은 꿈을 이루기 위한 또 다른 시도가 의미 없음으로 결론 내려질까 봐 더 두렵다. 나이를 핑계 삼아, 열심히 달려온 지난 세월을 무기 삼아, 60세도 되기 전에 이렇게 미래라는 도전을 접어버렸다. 그래서 나는 지금 잘 살아가고 있는 것 같지가 않다. 그래서 나는 지금 안녕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