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ct&Fiction/아버지를위한노래

3-01) 여행의 시작

truehjh 2014. 2. 25. 20:44

3-01. 여행의 시작

 

예전과 조금 달라진 점이 있다. 문자를 기억해 내는데 시간이 걸린다는 것이다. 자꾸 잊어버리는 것 같다. 이러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기억력을 되살려 보려고 ㄱ, ㄴ, ㄷ, ㄹ, ...을 외우곤 한다. 가, 갸, 거, 겨...도 써 보곤 한다. 어제는 모, 묘가 써지지 않아 정훈엄마에게 물어보았다. 틀렸다고 한다. 잊혀지는 모든 것들을 다 기억하려고 애쓸 수는 없어도 그래도 자꾸 되살리고 연습해야지.

 

요즈음은 더욱 글자가 아른거린다. 몇 십 년 익숙해진 성경속의 글씨들이 가물거려 확실하지 않다. 아무래도 안경을 바꾸어야 하겠다. 안경의 도수를 올려야겠다는 생각으로 엊그제 맏며느리와 정훈엄마와 함께 안경점에 갔었다. 검사도 하고 안경테도 골랐는데 갑자기 얼마나 더 사용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어 안경집을 그냥 나와 버렸다. 같이 갔던 식구들이 어안이 벙벙해 하는 모양이지만 안경을 새로 사면 뭐하나 싶어 그만 두기로 마음먹었다. 좀 더 눈이 어두워져서 지금 읽고 있는 성경책을 읽을 수 없게 되면 책꽂이 위에 올려놓은 큰글자 성경을 읽으면 된다. 작년 크리스마스에 ㄷㅂ제일교회에서 아주 큰 글자로 쓰여진 새로운 성경책을 선물해 주었다. 그 성경책으로 읽어야겠다고 생각하니 안심이 된다.

 

ㄷㅂ제일교회...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십자가이며 상급인 ㄷㅂ제일교회...

원로목사가 되기까지의 영광과 굴욕이 오직 주님만을 위한 것이었는지를 다시 한번 마음속으로 물어본다. 부끄럽지만 하나님의 종으로 교회를 섬겼던 지난 세월이 감사하다. 원로목사로 추대되면서 나는 ‘모든 영광을 오직 여호와께로’라는 시편의 말씀으로 답사했다. 그리고 남은 삶을 통해서도 끝까지 행동으로 교회에 보답하겠다고 답사의 서두를 열지 않았던가... ㄷㅂ제일교회...

 

성황당이라는 동네에 ㄷㅂ제일교회를 세우고 30년 동안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섬겼다.

이제 내 육신이 연약해져서 최선을 다해 교회를 섬기기가 힘겨워졌고, 그래서 은퇴를 하였다. 아직 은퇴할 나이는 아니지만 교회를 위해서 그렇게 결정하였다. 후임 목회자가 교회를 더 잘 섬겨 주기를 바라며 나 스스로 다짐한 일이다. 누가 알아주기를 바라는 마음은 전혀 없었다. 다만 하나님만은 나의 마음을 받아주시고 위로해 주시리라고 믿었다.

 

은퇴를 결정하니 교회는 나를 원로목사로 추대해 주었다. 원로목사로 추대되는 것이 영광스러운 일이기도 하지만 돌아보면 부끄러운 영광이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는 것 같다. 그리고 또 10년이 지났다. 지난 10년 동안은 원로목사로서 섬길 수 있는 일을 찾아 최선을 다하였다. 교회에 관계된 일에는 빠짐없이 참석하며 열심을 다했다. 물론 이 마음도 하나님만이 아실 것이다. 언젠가는 교회를 위해 사용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차비 아끼고, 아이들이 주는 용돈 모아서 저금해 놓은 비밀 통장도 하나 있는데 아무래도 애들 엄마에게 이야기해야 되겠다. 무슨 일이 생기면 ㄷㅂ제일교회를 위해 쓰라고 일러두어야겠다.

 

큰딸이 수술을 했다고 하여 지난 토요일에(8월 22일 토) 병원에 가 보았다. 환자용 침대에 누워있는 딸아이를 보는 것 외에 아비로써 해 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 아이는 기대하지 않았던 서장로 이야기를 했다. 뜻밖의 이야기였다. 내가 위임식 때 내 놓은 장학금을 아직 가지고 있는데 어떻게 사용할까를 묻는 편지가 왔다고 한다. ㄷㅂ제일교회에 사용하라고 말해 주었다. 밀린 과제 하나 해결한 것 같아 후련하다. 지키지 못한 약속이 또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것 외에는 생각이 나지 않는다.

 

오늘은(8월 25일 화) 일찍 서둘러 작은 아들집에 가봐야겠다. 퇴원해서 의정부 집으로 갔다는 딸아이를 한 번 찾아가 보고, 오는 길에 교회에 들려 공사가 잘 진행되고 있는지 보고 와야겠다는 생각으로 길을 나섰는데 모두가 말렸다. 지난 번 산보 길에서 두 번이나 넘어진 이후 나도 혼자 다니는 것이 조금 두렵기도 하지만 그래도 해야 할 일은 최선을 다해야 하지 않겠는가...

 

의정부 집에 갔더니 작은 아들이 마중을 나왔다. 애들 엄마는 뭐가 또 못 마땅한지 잔소리가 심하다. 땀을 왜 이렇게 많이 흘렸느냐고, 옷은 왜 그렇게 입었느냐고, 또 무어라고 말했지만 기억나지 않는다. 소파에 앉아 잠시 쉬고 있는데 금강산 이야기가 TV에서 흘러나온다. ‘얼마 전에 금강산관광 길이 열렸다는 뉴스를 보시더니 아버지는 금강산 가자고 하시는데 우리 둘이서는 못 간다고 했다. 아들 둘 중 하나가 같이 가야 갈 수 있다고 말했다.’라고 애들 엄마는 작은아들에게 큰 소리로 이야기한다. 살아있는 동안 고향에 한 번만이라도 가 볼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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