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3. 다시 아들집
며칠 만인지는 모르겠지만 집으로 돌아온 것 같다(9.15.화). 햇살 가득한 내 방이다. 그런데 방 구조가 변해 있다. 마주 보이던 정훈엄마 침대가 없어졌고, 내 침대는 병원용으로 바뀌어 있다. 책꽂이도 벽의 삼면에 그대로 있다. 다행히 신문들을 스크랩해 놓은 것도 그대로 있다. 각 신문의 논설은 논설대로, 만평은 만평대로 스크랩해 놓았고, 사회면도 잘 정리해서 모아 놓았는데... 지난 10여 년 동안 내가 했던 이 작업들이 필요한 곳에 쓰여질 수 있으면 좋으련만... 시골학교나 도서관에 기증하라고 언젠가 정훈에게 유언처럼 이야기했건만 기억이나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금방 정신이 들었다가도 무슨 약 때문인지 계속 잠이 온다. 얼마동안 자고 나면 똑 같은 상황이 계속되고 있다. 이렇게 식물인간으로 생명이 유지되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 안타깝다. 은퇴 후에 투병기간의 내 삶이 무의미했다고 생각되지만 지금에 비하면 너무도 감사한 것뿐이구나. 무엇인가로 표현할 방법은 없을까. 조금 전에 정희는 연필을 내 손에 쥐어주고 안경을 끼워주면서 판 위에 써보라고 하지만 왼손조차 말을 잘 들어주지 않고, 또 글씨마저 잘 생각나지 않는다. 낙담한 정희는 어떤 외국사람 이야기를 하며 그 사람은 한 쪽 눈만 움직일 수 있었는데도 그것으로 책을 한 권 썼다고 하니 아버지도 의사를 표현할 방법을 연구해 보자고 한다. 쓸데없는 일인 것 같다. 어떻게 하면 빨리 하늘나라로 갈 수 있을까를 생각해 보아야겠다.
지난 몇 년간 나의 기도 제목 중 첫번째가 하늘나라로 빨리 가게 해달라는 것이었는데, 하나님이 나의 기도를 이제 들어주시는 것일까. 그렇다면 지금 이 현상은 어떻게 해석하여야 하는가. 나에게 음식을 넣어주는 고무호스를 빼야겠다. 그러면 빨리 하늘아버지 집으로 갈 수 있지 않을까. 병석에 오랜 기간 누워서 고생하셨던 어머니가 생각난다. 새벽기도로 인해 모자라는 잠 중에 나를 부르시는 소리를 들으며 괴로워했던 그 시간들... 왜 그토록 오래 누워 계시게 하셨는지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없어 고통스러웠던 지난 세월도 다 잊혀졌는데 이제 내가 누워있는 것이구나...
아이들이 모두 집에 와서 날 위로하고 조금 전에 돌아갔다. 이렇게 마지막 인사를 한 것일까. 나는 얼른 코줄을 뽑아 버렸다. 이 코줄이 없으면 어떻게 될까. 그런데 내 몸에는 아직 큰 이상이 없고... 뽑아 놓은 코줄을 발견한 정훈이, 며느리, 정훈엄마가 큰 소리를 치며 야단법석이다. 지금 나의 의지로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왼손 하나인데, 그 손을 묶어 놓겠다고 으름장도 놓는다. 그러나 기회가 되면 적당한 시간에 다시 코줄을 뽑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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