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료한 시간에
이렇게 심심하고 무료한 시간을 맞으면 지나간 세월을 떠올려보곤 하는 습성이 있다. 그것은 계획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돈이 드는 것도 아니고, 많은 에너지가 소비되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누군가에게 해를 끼칠 소지가 있는 것도 아니다. 구체적인 대상의 비판을 받지 않아도 되고 위험 부담도 없으니까 나로서는 해볼 만한 놀이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내 앞에 놓여있었던 여러 갈래의 길을 떠올려본다. 그때 그 길을 선택하지 말고 다른 길로 갔으면 어땠을까. 스쳐 지나간 남자들 생각도 해본다. 내가 그 사람과 결혼을 했다면 어땠을까. 아니 저 사람이었으면 어땠을까. 성공하지 못한 일도 떠올려 본다. 처음 시도한 일이 성공했다면 어땠을까. 세 번째 시도한 일이 성공했다면 어땠을까. 마구 상상의 나래를 펼치다가 결국은 나락으로 떨어지고 나서야 정신을 차리지만, 희비가 엇갈리는 감정의 소모도 적어진 나이인지라 그런대로 심심풀이 땅콩은 된다.
돌이켜보면, 연신원 시절의 결정이 가장 크게 후회된다. 지금까지 살아온 과정에 최선을 다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다시 살아보라면 나는 연신원의 시간으로 돌아가고프다. 기독교교육 석사과정을 마무리하고, 유학을 떠나 공부를 더 해서 기독교교육학자로 살아왔다면 지금보다는 좀 더 의미 있는 삶을 살았다고 감사할 수 있을 것 같다. 혹은, 연신원에서 남자를 만나 결혼을 했다면 목회를 도우며, 목회자 자녀를 훌륭하게 키우는 삶도 꽤 괜찮은 삶이었을 것 같기도 하다. 나중의 일이지만 미국에서 돌아온 후에 사회복지학 공부를 좀 더 하고 장애인복지학자로 현장에 남아있었더라면 좋았을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가상이다. 독기에 찬 세월을 살아본 적이 없어서인가 아직 정신 못 차리고 있는 것이다. 현실로 돌아와 보면, 지금의 내 삶이 나에게 가장 어울리는 삶이라는 생각이 든다. 의지가 그리 강하지 못하고, 체력이 좀 떨어지는 나의 실체를 인정한다면 그런 후회는 할 필요가 없다.
지난 삶에 대한 천착은 살아갈 세월이 살아온 세월보다 훨씬 짧다는 것을 자각한 증거다. 나이가 들면 추억의 힘으로 산다고들 하는데 나에게 힘이 되고 위로가 될 만한 추억거리를 찾아내기가 어렵다. 사실 인생의 전반부까지는 내속에 웬 ‘너’들이 그렇게 많았는지 모르겠다.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내 삶을 지켜내는 것이 쉽지 않았다. 삶의 중반부엔 사라져 버린 ‘나’의 행방을 수소문하며 수탄 시간을 보냈으니, 방황의 시간이었다고나 할까. 이제 후반부를 맞이하여 너나 나를 가리지 않고 오롯이 ‘우리’로 살아가고 싶다는 소망을 품어보기도 하지만,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 이렇게 과거에서 벗어나는 순간에 머릿속을 맴도는 단 한 가지 질문은 나의 현재 주소에 관해서다. 지난날에 꾸었던 꿈들이 발목을 잡고 있어서 나는 지금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다 포기하고 새롭게 시작해 보겠다는 용기가 생기지 않는다.
나의 삶이 정말 이렇게 한정되어 있는 것일까? 더 이상의 희망과 꿈은 욕심에 불과한 것일까? 문득, 내 삶이 너무 단순해 보일 때 어떻게 나를 추스를 수 있는지 잘 모르겠다. 아주 사소하거나 감정적인 일들로 마음에 갈등이 생기면 해결하려고 노력하기보다는 게으름을 부리면서 그냥 미루어 놓을 때가 많다. 별것 아닌 것 같은 일에 가타부타를 결정하는 것이 오히려 어렵다. 큰 문제가 발생하면 올바른 길을 선택하기가 쉬울 것 같은데 말이다. 그러나 작은 일에도 선하다고 여겨지는 것과 긍정적인 것을 선택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작은 결정들이 삶의 길을 이으며 만들어가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자. 작은 일들에 세심하게 반응하자. 앞으로 나가지도 못하고, 뒤로 물러서지도 못할 때 세밀하게 돌아보자. 본성적인 감정의 흐름을 경계하고, 가난한 마음으로 섬세하게 방향성을 감지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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