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세에 부르는 이름... 엄마... 엄마... 엄마...
응급실로 갔다가 입원하신 엄마는 상태가 점점 나빠져 중환자실로 들어가셨다. 중환자실은 1일 2회의 면회시간만 허락된다. 그래서 그곳에 누워계시는 엄마를 하루 두 번 밖에 뵐 수가 없다. 너무나 고통스러워하시는 엄마를 볼 때마다 엄마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귀에 대고 수없이 말했다. ‘엄마... 사랑해... 엄마... 감사해... 엄마... 고마워...’ 육체의 시스템이 모두 제 기능을 잃어가는 가운데서도 엄마가 내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고 믿으며 반복해서 말했다. 때로는 알아들으시는 듯... 때로는 고통 때문에 듣지 못하시는 듯...
그리고... 2015년 2월 1일 오후 4시 19분... 엄마는 마지막 숨을 쉬셨다. 엄마를 떠나보내는 그 자리에서 우리 형제 모두 눈물의 기도를 드렸다. 의사의 사망선고를 듣고 밖으로 나왔다. 끝까지 엄마를 모셔준 작은 올케의 손을 붙잡고 한참 울었다. 고맙다는 인사의 말을 하면서 나도 마음을 다잡았다. 그날 밤 빈소에서 엄마가 출석하고 계셨던 교회의 성도님들과 함께 위로예배를 드리고, 그다음 날 오후 엄마가 목회자의 아내로 섬기시던 교회 주관으로 입관예배를 드리고, 삼일 째 되는 날 아침 발인예배를 드린 후에 해방교회묘지에서 해방교회 주관으로 하관예배를 드렸다. 엄마의 육체는 꽃잎들과 함께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엄마가 떠나가신 지 열흘이 지났다. 난 아직 엄마가 곁에 있는 것 같아서 빈자리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엄마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실감 나지 않는다. 이제부터 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모르겠다. 아무것도 손에 잡히는 것이 없고,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는다. 할머니의 나이가 된 딸임에도 불구하고 엄마를 찾는 것이 참으로 유치해 보이겠지만 어쩔 수 없다. 무조건 내편이라고 믿었던 엄마라는 존재의 부재가 불러온 현상이다. 엄마가 없는 세상에 발 들여놓고 용감하게 발자국을 내 디뎌야 하는데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다.
사랑과 추억을 남겨두고 하늘나라로 가신 엄마... 오늘 아침에 일어나 습관처럼 엄마의 방을 열었다. 빈 침대 옆에 엄마의 영정 사진만 덜렁 놓여있는 엄마의 방이다. 웃고 계시는 엄마의 사진이 엄마의 실상인 것처럼 착각이 된다. 조용하신 엄마의 움직임이 벌써 그리워진다. 엄마 방에도, 엄마가 사용하던 화장실에도, 엄마가 가끔 나와 앉으시던 소파에도 엄마는 계시지 않는다. 커다란 가족사진 안에는 계시는데, 그 엄마를 지금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엄마의 빈자리가 너무 크다.
식탁을 마주하면 엄마 생각이 더 난다. 엄마가 살아계셨더라면 아침 해가 밝아올 때에 잠을 깨워 식사를 함께 했을 것이다. 식탁 위에 음식을 차려놓고 엄마 방에 가서 식사 시간임을 알려드리면, 엄마는 하고 계시던 동작을 일단 멈추고 일어나 구부정한 허리를 곧게 펴시고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나오신다. 둘이 식탁의자에 앉아 맛이 있든 없든 한 끼의 식사로 차린 양을 나누어 먹는다. 식사를 마치면 엄마는 식탁 치우는 것을 도와주신다. 기우뚱하게 걸으며 반찬이 담긴 그릇들을 냉장고로 옮기는 내가 불안해 보여서일 것이다. 가끔 행주질도 해 주신다. 그리고는 곧바로 화장실에 가셔서 이를 닦고, 틀니를 닦고, 세수를 하시고, 머리를 빗고, 엄마의 방으로 들어가셔서 낮은 책상 앞에 앉아 성경을 읽곤 하셨다. 나는 설거지를 마치고, 손을 씻고, 커피 물을 올리고 나서, 엄마의 약을 챙겨드린다. 엄마의 커피 타임은 약을 드시고 두 시간쯤 지나야 한다.
오늘 아침 나 혼자 아침식사를 하면서, 내가 집에 없었던 날을 뺀 거의 모든 아침에 엄마와 함께 했던 식사를 떠올려 보았다. 반찬을 골고루 드시라고 잔소리를 하고, 식사할 때 물을 너무 많이 드시니까 밥맛이 없어지는 거라고 잔소리를 하고, 밥을 덜어드린 만큼은 다 드셔야 한다고 잔소리를 하고, 곰국에 소금을 많이 넣지 말라고 잔소리를 했다. 국에 말아 드시면 될 터인데 국물을 옆에 놓고서도 굳이 물에 말아 드시는 엄마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잔소리를 하면 싫은 얼굴을 하셨지만 나에게 화를 내시지는 않으셨다. 엄마는 내 잔소리에 지치셨을 터인데도 아무 말씀 없으셨다.
점심식사로 가끔은 엄마가 좋아하시는 냉면이나 우동, 짜장라면을 메뉴로 올렸다. 피자와 치킨도 마다하지 않으셨다. 평상시에는 주로 간편식으로 차렸다. 두유와 함께 식빵 한 조각에 버터와 딸기잼을 발라 드시는 것을 좋아하셨는데, 프라이 한 달걀을 함께 드리면 싫어하시는 엄마인 줄 알면서도 하루에 달걀 하나 정도는 드셔야 한다고 억지를 부려 잡수시게 했던 것이 후회된다. 식구가 다 함께하는 저녁 식탁은 주로 며느리가 차렸으니 엄마의 마음이 좀 편했을까. 지금 생각해보면 저녁식사는 그래도 마음 편하게, 맛있게 드셨을 것 같다. 장애를 가진 딸이 힘들게 차리는 식탁이 아니라 며느리가 풍성하게 차려드리는 식탁이니 말이다.
식탁에 앉을 때마다 엄마 생각을 할 것 같다. 얼마 동안이나 엄마의 허상 때문에 텅 빈 마음으로 엄마를 보고 싶어 하게 될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눈물이 난다. 아무리 나이 많은 부모가 돌아가셨다고 해도 호상이라는 말은 맞지 않는다고 여겨지는 것이 자식의 마음이다. 회갑을 맞는 해에 어머니를 여의는 것이 누구나 누릴 수 있는 행운이 아니라는 것도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마를 보내드리는 마음은 애절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엄마가 하신 말씀이 ‘이제 내가 과부가 되었구나...’였다. 칠순이 다가오는 연세에도 그런 말씀을 하셨다. 젊은 청춘이 아니었는데도 말이다. 나도 마찬가지다. ‘이제 나도 완전한 고아가 되었네...’ 회갑을 맞는 나이인데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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