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친구들
오늘 저녁은 TV 드라마 디어마이프랜즈를 볼 수 있는 날이다. 이 드라마는 고향 초등학교 동기나 선후배들의 우정을 배경으로 삼고 있는데, 주변에 있는 친구들의 이야기 같아서 다음 회를 기대하며 즐겁게 보고 있다. 다양한 삶의 스타일을 표현해 내는 배우들의 연기력도 대단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바라보는 작가의 관점도 훌륭하다. 보통 사람들의 인생과 그 삶의 힘을 보여주고 있는 작가에게 경의를 보낸다. 여기에 등장하는 중년 이후의 인물들은 모두가 개성이 넘치는 캐릭터를 가지고 있다. 그러면서도 함께 어울려 공동체적인 삶을 꾸리며 살아간다. 드라마에서 그려지는 다양한 언어적 유희 속에서 내가 특히 동질감을 느끼며 감정이 이입되는 부분은 장애를 가진 남자를 사랑하는 딸과 그 엄마의 대화다. 언젠가 나나 내 친구들과 우리의 부모님이 고민해 보았고, 토로해 보았고, 들어봤음직한 절절한 대화가 심금을 울린다.
나에게는 30~40년 동안 우정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장애인 친구들의 모임이 있다. 장애인에 대한 인식이 지금보다도 훨씬 못 미쳤던 사회에서 동병상련의 고통을 나누며 살아온 친구들이 겨자씨라는 이름으로 모였다. 드라마에 등장하고 있는 인물들과는 다른 성격을 띠고 있는 구성원이지만 오랜 기간 동안 서로의 삶에 영향을 끼치며 살고 있다는 점에서 유사성을 가졌다. 이 중에는 동시대의 문화를 공유하면서 더욱 밀접하게 서로 의지하고 살아오고 있는 같은 또래의 친구들이 있다. 특히 삶의 지표를 공유할 수 있고, 함께 이야기를 나눌 수 있고, 오해했다가도 시간이 지나면 풀어지고, 갑론을박하면서도 서로를 존중하는 사이로 발전된 두세 명의 친구가 있다. 선입견 없이 내 모습 자체로 용납된다고 느껴지는 친구들이며, 서로가 서로의 지난 삶을 다 알아서 목적 없는 단순한 수다만으로도 위안이 되는 사이다. 그들로 인해 인생은 살만하다고 느끼게 되는 순간들이 있어 행복하다.
어느 날 겨자씨의 모임에서 한 친구가 말했다. “내 삶에 관여해 줘...!” 강력한 신뢰와 진한 외로움이 묻어 있는 이 한마디가 나의 마음을 두드렸다. 물론 나 혼자 받은 프러포즈가 아니고 겨자씨 모두에게 던져진 프러포즈였지만 이보다 더 진솔하고 용감한 프러포즈가 또 어디 있을까. 유명한 영화의 명장면이 되기도 하는 프러포즈 못지않게 내 가슴을 뛰게 하는 말이었다. 이런 따스함과 진지함을 누구에게서 느낄 수 있단 말인가. 이런 우정을 나누고 공감하는 우리는 각자가 주인공이 되어 서로를 챙긴다. 가끔 손님처럼 오면 결코 느낄 수 없는 분위기다. 그날은 특히 싱글로 살고 있는 남성들의 진솔한 이야기를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어서 좋았다. 성을 완전히 배제하거나 초월하지도 않은 분위기, 그래서 약간의 긴장감을 가질 수 있고 적당한 예의도 갖출 수 있는 분위기, 술 취하지 않고도 어느 정도의 솔직한 수다를 나눌 수 있는 분위기, 이것 또한 나쁘지 않다.
겨자씨 친구들이 나에게 해 준 일이 바로 그런 것이다. 나 또한 마찬가지로 그들에게 그렇게 다가서려고 노력한다. 새삼스럽지만 친구는 오래된 친구일수록 좋다는 말이 맞는 것 같다. 지난 젊은 시절에 인생의 중대한 과제들을 마주할 때마다 서로의 이야기를 들어주며 공유하고, 서로에게 지지가 되어 주며, 서로의 삶에 관여해 주었던 아름다운 순간들! 이제 또 노년을 살아가며 맞이하게 되는 절박한 이슈들에 대하여 앞뒤 재지 않고 늘어놓을 수 있는, 따지거나 시시비비 가리지 않고 공감할 수 있는, 그래서 마음이 편안해지는 겨자씨의 분위기! 언제나 그 자리에 있어서, 답답해서, 탁상공론일 뿐이어서, 신세한탄이어서, 그래서 싫은 사람도 있겠지만 난 그래서 오히려 더 좋다. 내가 어디에 가서 이런 답답하고, 탁상공론적이며, 신세한탄조의 이야기를 내뱉을 수 있단 말인가. 이 나이에...
이 나이의 인생에서 친구들만큼 중요한 대상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나 잘 모르는 먼 곳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닌 나의 그리고 우리의 이야기를 마음 놓고 할 수 있는 친구들과 함께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친구에게서 굳이 해답을 얻으려는 것이 아니다. 그저 소통할 수 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늙은 싱글들의 우울하고 고독한 자기 고백이라도 좋고, 가족 속에서 느끼는 커플들의 진한 외로움이어도 좋다. 장애라는 공감대를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 삶의 애환을 나누며 서로의 삶에 관여해 주는, 진솔한 친구로서 서로에게 적당한 울타리가 되어 주는, 술에 취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이야기에 취해 주는, 그런 이모셔널 스페이스가 되어 주는 친구들이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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