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사랑/참좋은이웃

까까머리와 단발머리 시절의 추억

truehjh 2016. 6. 21. 20:58


어제 친구의 아버지 부고 소식을 받았다. 예정되어 있었던 일이기는 하나 마음이 아팠다. 작년에 내 엄마를 보내드리던 순간들이 기억나서 그 친구의 슬픔이 남의 일 같이 느껴지지 않았다. 모임의 언니들에게 소식을 전하고 만날 시간도 정했다. 밤엔 잠시 싱숭생숭해져서 잠을 이루기가 어려웠다. 어차피 상주들을 만나야하겠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대면할 수 있을까... 모르는 척... 아니면 그냥 조문객 중 한 사람으로... 설마 아는 척은 하겠지... 등등의 생각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오늘 그는 두 팔을 벌리고 다정한 허그 인사로 나를 맞아주었다. 애도의 장소인지라 잠시 당황했지만 나도 그렇게 인사했다. 40년 만의 만남이었는데 이 한 번의 허그로 인해 우리는 순간적으로 까까머리와 단발머리 시절로 환원되었다. 마음을 따뜻하게 해준 그 허그가 타임머신을 대신해 준 것이다. 그는 고등학교시절 이후에는 못 본 것 같다고 했지만 대학생일 때도, 군대에서 휴가 나왔을 때도 길거리에서 한두 번 마주치기는 했었다. 그 다음부터는 만날 기회가 없었다. 망우동 주영약국시절 내 생일 즈음에 전화를 한번 받은 것이 아마도 마지막이었을 게다. 그때 자신의 결혼소식을 나에게 전해주었던 것 같다.

 

중학교 졸업식 날이 생각났다. 그가 우리 학교에 나타나 나를 깜짝 놀라게 했다. 남학생이 여학생의 졸업식에 온 것이다. 그 당시 내 상식 수준으로는 엄청 부끄러운 일이기도 했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기억은 없지만, 우리학교 졸업식을 마치고 나도 그의 졸업식에 갔다. 졸업식 날이 같은 날이었나 보다. 그가 받은 붉은 색 종이꽃 목걸이를 나에게 걸쳐 주어서 내가 주인공이 된 것 같이 사진도 찍었다. 그의 엄마가 사주신 짜장면도 먹었다. 그 사진이 없어져서 섭섭하지만 10대 중반의 아름다운 추억이다.

 

그의 집에는 책이 많았다. 방학이 되면 그 집에서 책을 빌려다 보곤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잘 이해도 되지 않았을 고전들을 어떻게 통독했는지 모르겠다. 내가 그 집에 가서 빌려오기도 했지만 책들이 무거워 그가 우리 집에 가져다 준적이 더 많은 것 같다. 그리고 우리 사이에서 교회 이야기는 빠질 수가 없다. 그것은 어린 시절 마음의 고향으로 떠나게 하는 전주곡이다. 단 몇 단어만으로도 그 많은 추억을 끄집어낼 수 있게 한다. 벌집, 신앙강좌, 새벽송, 도서전집, 세익스피어의 4대 비극... 그 추억들이야말로 우리의 시작이다. 그는 학생회에서 모든 일들을 척척 해결해 내는 유능한 회장이었고 여학생들에게 인기도 많았다. 아마도 이것이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게 했던 이유일 것이다.

 

하여간에 나는 그를 친구로 여겨야하는지, 친구의 오빠로 여겨야 하는지가 헷갈리는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 모호한 관계성이 나를 서툴게 또는 서먹하게 하곤 했다. 오늘에야 비로소 그 애매모호한 관계를 정리했다. 친구의 오빠로. 사실은 친구이고 싶었지만 우리의 나이가 친구건 친구의 오빠이건 별 의미가 없는 시간을 맞이하고 있기에 쉽게 교통정리를 해버릴 수 있었다. 세월은 이렇게나 멀리 와 있었다. 나는 그도 나와 같은 추억거리들을 공유하고 있는지가 가끔은 궁금했다. 언젠가 한번쯤은 만나서 순수했던 그 시절을 이야기하고 싶었었다. 오늘 정말 잘 했다. 비록 장례식장에서 만났지만 이 나이에 그러한 장소에서 만나는 것도 인생의 깊은 의미를 느낄 수 있게 해주어서 괜찮은 듯하다.

 

내가 보고 싶었냐고 물었다. 보고 싶었다고 했다. 왜 보고 싶다는 말을 하지 않았냐고도 물었다. 여러 번 보고 싶다고 말했단다. 그래서 그냥 둘 다 웃었다. 우리는 서로 잘 살아온 것 같다. 지금도 잘 살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앞으로도 우리 모두 다 잘 살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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