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세... 낭만
어젯밤에는 여러 번 잠에서 깼다. 한 잠 자다 깨고, 두 잠 자다 깨고, 세 잠 자다 깼다. 깰 때마다 어렴풋하게 느꼈던 감정은 설렘 반 긴장감 반이었다. 여유로운 설렘과 불안하지 않은 긴장감이라고나 할까? 매우 늦은 나이에 독립을 계획하는 마음이 꿈에 반영되었나 보다. 꿈이 아닌 현실에서도 독립에 대한 숙원이 이루어질 것 같은 묘한 설렘과 긴장감이 느껴진다. 나에게 독립이란 말의 의미는 동생집에 예속되지 않는 상태로 혼자 사는 것이다. 지금까지 오랫동안 동생가족과 함께 살아온 나로서는 가족 없이 혼자 살아야 하는 상황이 익숙하지도 않고, 잘 그려지지도 않는다. 그러나, 아무튼, 어쨌든 분가를 해야 한다. 싫은지 좋은지의 문제가 아니다. 상식적으로 당연한 과제였으며 해결해야만 하는 숙제였다. 피해 갈 수도 넘어 갈 수도 없다.
인생이라는 길 위에서 몇 발자국 앞서기도 하다가, 한참을 뒤처지기도 하면서 걷다 보니 어느새 3/4 지점에 접어들었는지 꿈만 같다. 뒤돌아보는 세월은 분초 같이 느껴지지만 앞을 내다보면 아스라하다. 본향을 찾아가는 순례자의 기분이 이런 것일까 상상해 본다. 순간순간 살아온 과정이 질풍노도의 길은 아니었더라도 변화무쌍해서 지루하지는 않았다. 물론 자타가 공인하는 명예를 얻었거나, 누구나 인정하고 부러워하는 업적을 쌓은 것은 아니다. 인류에 길이 남을 멋진 일을 해낸 것도 아니다. 하지만 병고의 위험에 빠지지 않고 살 수 있었고, 극심한 육체적 고통도 겪지 않았으며, 정신적으로 피폐해질 조건도 발생하지 않은 세월이었다. 그저 평범한 사람들 속에서 행과 불행을 맞으며 살아온 삶이 고마울 뿐이다. 그런대로 풍요로운 삶이었던 것 같아서 그럭저럭 감사함 마음으로 삶의 종착점을 향해 갈 수 있을 것 같다.
이제 독립이라는 또 한 고개를 넘어가야 한다. 어떤 삶이 펼쳐질지 걱정이 되면서도 새로운 일이나 사건에 대한 기대감이 생긴다. 앞으로 내가 할 일은 무엇일까. 갱년기를 지나 건강상의 핑계로 사회활동을 멈춘 후부터 엄마 돌아가시기 전까지는 엄마 옆에 있어야 한다는 나의 일이 있었고, 조카 대학 갈 때까지는 공부를 도와줘야 한다는 나의 일이 있었다. 그런데 엄마는 돌아가셨고 조카는 대학이 결정되었다. 내가 할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다 지나갔다. 이쯤에서 지난 세월을 회고하며 감사하며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앞으로 가야 할 남은 길을 점검해 보는 것이 우선일 것 같다. 독립을 앞에 두었으니 무슨 일을 준비할까. 독립을 통해 오롯이 나로 서는 일인 것 같다. 누구도 의지하지 말고 씩씩하게 홀로 내 삶을 이어가는 것 말이다.
이쯤에서 먼저 자축의 시간을 가지며 독립의 동력을 만들어야겠다. 요즘 많은 사람들은 소소한 일도 특별한 날로 만들어 축하하고 기념한다. 생일을 축하하듯 모든 기념일을 축하한다. 처음 만난 날을 기념하여 축하하고, 사랑을 시작한 지 백일을 기념하여 축하하고, 천일을 기념하여 축하한다. 생리 시작도 축하하고, 헤어스타일 바꾼 것도 축하하고, 시험 끝난 것도 축하한다. 살아가는 모든 과정을 축하할 수 있다는 것도 복이다. 그러나 나는 이 모든 축하의 감정에 완전히 동화되지는 않는다. 드러내 놓고 끼어들어 삶을 축하하고 기뻐할 능력은 없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것을 즐길 능력은 가지고 살고 싶다. 그래야 독립을 자축할 수도 있지 않은가. 독립을 통한 온전한 나의 삶의 과정들을 용감하게 즐기며 살아갈 수 있으면 좋겠다.
그냥 독립적으로 살아가고 있는 내 모습을 통해 주변 사람들을 안심시킬 수 있으면 된다. 더 나아가서 위로를 주는 삶을 살아갈 수 있다면, 그것이 나의 일이 된다면 나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삶이 될 것이고, 의미 있는 삶이 될 것이다. 가족이 없다는 것을 탓하지 말고, 무엇을 이루지 못한 것을 탓하지 말자. 가족을 만들어야 할 것 같은 초조함과 무엇을 이루어야 할 것 같은 압박감으로부터 자유하자. 싱글라이프를 즐기겠다는 자신감을 가지자. 내가 살아 숨 쉬고 있는 현실에 대한 책임감과 의무를 완수하며 홀로 우뚝 서자. 여기에서 오는 긴장감과 설렘을 즐기자. 삶이 아름다워 보이기도 하니 안도감이 느껴진다. 63세, 어느 날에 찾아온 아이러니한 낭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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