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ct&Fiction/시니어시대

자가격리 형태의 삶

truehjh 2021. 4. 3. 19:31

자가격리 형태의 삶

 

43. 내가 영태리로 주거독립을 이룬지 만 3년이 되는 날이다. 비가 주룩주룩 내리고 있는 앞마당에 꿋꿋하게 서 있는 자두나무에는 상아빛 꽃이 만개했다. 아직 꽃비는 내리지 않는다. 제주 4.3사건 73주년을 맞아 희생자 추념식이 거행되고 있는 4.3평화공원에는 무지개가 떴다고 한다.

 

계획했던 식사 모임을 기약 없이 미루고 말았다. 주변이 좀 안정되고 마음이 편해질 때 즐겁게 만나자고 어쭙잖은 핑계를 댔다. 감염자 수가 급증하고 있어 거리 두기 방역 조치도 다시 3주 연장되었고, 도시락을 준비해 오겠다는 말도 부담되는 등 이런저런 이유로 마음이 복잡해져서다. 음식점에 나가서 먹든지 배달음식을 시켜서 먹을 생각도 해봤지만 다 마음이 편치 않았다. 집에 오신 손님을 맘 편히 식사 대접할 솜씨도 없는 상황이 한심하게 느껴져서 더 심란했다. 표면적으로 보이는 이런 핑계는 다 진실이다. 그런데 더 깊숙이 파고들면 또 다른 심리상태를 바로 파악할 수 있다. 이 모든 상황을 대하는 나의 고립심리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하여간에 지금 내 마음은, 그야말로 이중성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현장이다. 단절을 원하는 마음과 소통을 원하는 마음으로 나뉘어 있어서 어느 것 하나로 정리할 수가 없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서 외부와의 모든 연결고리를 끊어내려는 무의식적 노력과 다른 한편으로는 이렇게 살다가는 완전고립될 수도 있다는 두려움과 걱정이 맞부딪치고 있는 격전장이다. 스스로 유폐시키고 있는 삶의 패턴이 바로 그 증거다. 코로나19 팬데믹이 시작되면서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어쩌면 그 이전부터일 수도 있다. 주거독립을 실행하면서 관계망을 정리하겠다고 마음먹은 적이 있었다. 나이 들어가면서 내가 의도적으로 정리하지 않아도 인간관계의 폭이 줄어들고, 사회 참여나 활동의 양이 줄어들 수밖에 없었는데, 공연히 미리 나서서 정리하려고 서둘렀던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런 현상은 진심으로 내가 세상을 향한 마음을 접기 시작하는 건지 아니면 종국에는 맞이하고야 말 외로움에 대한 대비책의 일환으로 선택하는 건지 나도 잘 모르겠다. 모든 것이 제로로 돌아가고 있는 것 같다. 순식간에 마음과 의지가 무너진다. 속수무책이다. 내가 아무리 강한 의지로 이 상황을 극복하려 해도 엄두가 나지 않는다. 그나마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계속 뭔가를 기록하는 것이다. 그리고 기록한 것들을 모아 편집하고 책으로 엮을 계획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뭘 어쩌자고 계속 쓰고 만드는 것일까. 이것마저 버리면 소통의 통로가 아예 없어져 버릴 것 같아서인가. 그래도 한줄기 소통의 통로는 필요한 것인가.

 

나는 내가 하고 있는 일을 왜 하는가(Why am I doing what I am doing?)를 계속 질문한다. 내 안에서 부유하는 생각 조각들을 그냥 가둬놓고 있으면 뭔가 차올라와 견딜 수가 없어서, 그래서 쓰는 거다. 내 안에 가둬놓은 채로 있을 수 없어서 단어나 간단한 문장으로 다 배설하는 거다. 남의 눈치 안 보고 내가 하고 싶은 걸 하는 거다. 그러다가 급하게 갈증을 느끼게 되면 욕심을 내려놓고 쉰다. 딴짓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거다. 멀리는 못 간다. 그러다가 돌아와 책상 앞에 앉아서 숨을 가다듬고 다시 생각을 떠올린다. 그리고 또 쓴다. 나 자신과 소통하는 일 외에는 하는 일이 없다. 나 자신 안으로 더 깊이 홀로 들어가는 것이다. 이렇게 천착되어 가면서 나이 들고 나면 그다음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내가 관심 가지고 있는 일이나 분야가 무엇인가. 내가 가지고 있는 자원을 활용하면 어떤 콘텐츠를 생성해낼 수 있단 말인가. 의미 있는 어떤 일을 하고 갈 수 있을까. 그저 남보다 단순하게 살아온 흔적뿐 아닌가. 나이 들어 되돌이킬 수 없는 시점이 되기 전에, 더 깊고 넓게 삶을 내다볼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자기 안으로 몰두하는 것일까. 아니면 다양하게 적응하는 것일까. 1년이 넘게 지속되는 거리 두기의 삶은 나를 더 단순하게 몰아가고, 난 거기에 적응하면서 점점 더 스스로를 유폐시키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 계속 이렇게 가는 것일까. 아니면 다시 두리번거리며 밖으로 나올 수 있게 될까. 밥 먹자는 핑계로 좋은 사람들을 찾아 만나고 싶은 마음으로 들뜨는 날이 과연 돌아올까.

 

평범한 일상이 가장 특별한 삶의 시간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있다. 우리 모두가 다시 일상으로 돌아 갈 날을 간절히 고대하며 이 절박한 시간을 잘 견뎌내야만 한다. 몇 안 되는 형제들과 안부를 묻거나 이야기가 통하는 몇몇의 친구들이나 지인들과 전화로 가끔 수다를 떠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정말 삶이 이렇게 씸플해질 수 있다는 말인가. 놀랍도록 단순한 나의 삶이다. 10년 또는 15년 후 독거노인의 삶을 미리 예행연습하고 있는 것 같아 몹시 씁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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