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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2 제주도(5) 험난한 귀가길

truehjh 2021. 12. 29. 18:52

2021.12.06.(월) 

 

새벽 5시에 일어나 짐 가방을 정리하고 있는데, 땀이 비같이 흘러내렸다. 이대로는 집에 갈 수 없겠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공항으로 가다가 쓰러져서 응급실로 갈 바에는 차라리 호텔 방에 혼자 머무는 것이 낫겠다 싶었다. 코로나 시국에 병원행이라니, 말도 안 된다. 나는 혼자 남아있기로 마음먹었다. 이러한 상황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잘 알기 때문에 시간이 지나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일어날 수 있다고 믿었다.

 

옆 침대에서 뒤치락거리고 있는 도토리에게, 나는 오늘 공항으로 가지 못하겠다고 말해주었다. 지금은 움직일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고 하고 침대 위에 쓰러졌다. 다음 일은 정신이 들면 생각하기로 했다. 마음 한편에는 혼자 남게 되면 제주도에 사는 친구를 불러야겠다는 대책은 있었다. 조카는 너무 놀라서 자기 아빠에게 연락하고, 남동생은 내 비행기표를 연기하고, 호텔에 이틀 더 머물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해 놓고, 서귀포에 있는 오빠에게 연락했단다. 작은올케와 도토리는 약과 죽과 꿀물을 사다 놓고 떠났다.

 

오빠네가 서귀포에 남아있다는 사실은 나중에 생각났다. 친구에게까지 도움을 요청할 필요는 없겠다는 생각에 안심하고, 비몽사몽의 시간을 보내는 동안 오빠 내외가 다녀가셨다. 눈조차 뜰 수 없어서 내 상황을 상세하게 설명하지는 못했지만, 혼자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오빠네를 보내드렸다. 이런 상황에서 부담을 느끼지 않고 의지할 수 있는 형제가 있다는 사실이 무엇보다 감사했다. 언제나 어디서나 섬세하게 나를 보살펴주시는 나의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면서 꿈결을 헤매다가 오후 다섯 시쯤 겨우 눈을 떴다. 그러나 아직 물을 마시지 못하겠다.

 

2021.12.07.(화)

 

또 날이 밝았다. 저녁까지는 정신 차려야 하는데 아직 어떤 힘도 나지 않는다. 그냥 그대로 시간을 흘려보내고 있다. 점심에 오빠가 다시 서귀포에서 올라오셨다. 안 와도 된다고 내가 말했었는데, 오빠는 걱정이 돼서 안 와볼 수가 없단다. 오늘 저녁에는 오빠네도 이 호텔로 옮기겠다고 한다. 눈물이 났다.

 

눈을 조금 뜨고 오빠에게 할머니 이야기를 했다. 오빠는 금방 알아들었다. 할머니의 속앓이 또는 가슴앓이라고도 했던 병이 시작되면 아무것도 드시지 못하고 보름에서 한 달 정도 누워계셨다. 동생들은 잘 기억하지 못하는 할머니 이야기를 우리는 함께 기억했다. 이번 여행은 오빠를 다시 깊게 이해하게 되는 기회였다.

 

죽이라도 사다주겠다는 오빠에게 나는 꿀물 두 병과 뜨겁게 데운 햇반을 사다 달라고 부탁했다. 꿀물과 함께 쌀밥 반 숟가락을 입에 넣고 5분 동안 꼭꼭 씹어서 삼키면 포도당 주사 맞는 것처럼 될 수 있지 않을까. 모든 에너지를 저축해서 내일 집에 가는 에너지로 사용해야지. 집에서가 맘 놓고 아파야 나을 거 같아.

 

소변은 한번 보고, 꿀물 한 병과 물 반 컵으로 하루를 연명했다. 저녁에는 겨자씨 줌모임이 있었는데, 영상은 포기하고 잠시 목소리만 등장해서 출석체크 하고 나왔다. 친구들의 관심과 남동생과 오빠 가족의 따스한 돌봄과 막내동생의 기도 덕분에 난 외롭지 않다.

 

2021.12.08.(수)

 

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집으로 가야 한다는 일념으로 모든 에너지를 동원해서 7시에 일어났다. 정신을 말간데 힘이 없다. 9시에 오빠 내외가 나 있는 방으로 와서 모든 것을 정리해 주고 짐을 들고 나왔다. 힘들면 업고 가겠다는 오빠의 말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택시를 부르고, 공항에 도착해서 아무 생각 없이 오빠네를 따라 다녔다.

 

김포공항에 도착하니 장조카가 차를 가지고 나와 있었다. 우리는 모두 영태리로 왔다. 나 때문에 식사도 할 수 없는 형편이 되었다. 미안하지만 다음을 기약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우여곡절 끝에 나는 내 침대에 누웠다. 아무 생각을 하지 않기로 했다. 아니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아무런 욕구도 생기지 않는다. 욕구뿐만 아니라 감정이나 생각 자체가 없다. 뇌가 텅 비어있는 느낌이다.

 

뭔가 하고 싶은 욕구가 생길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치킨이 먹고 싶어질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그러나 먹고 싶어졌다고 냉큼 먹으면 큰일 난다. 뜸을 들이고 숙성할 때까지 또 기다려야 한다.

 

2021.12.10.(금)

 

동생이 사다 준 죽과 작은올케가 만들어준 반찬과 친구가 손수 쑤어다 준 죽을 먹으며 며칠을 조용히 지냈다. 전화나 문자도 대충 받으면서 에너지를 아꼈다. 단지 빨리 일어날 에너지를 모아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내가 아프면 형제들에게 엄청 민폐를 끼치겠구나라는 생각에 이르니 정신이 번쩍든다.

 

나이가 드니 아프면 마음이 약해진다. 나는 아프거나 힘들 때 어떻게 위로받기를 원하는가. 그리고 어떻게 위로하고 있는가. 깊이 생각해보고 싶은 주제다.

 

2021.12.17.(금)

 

아직 몸의 상태가 제자리로 돌아오지 못했다. 이번에는 초기대응이 부실해서 회복하는 시간이 조금 오래 걸리는 것 같다. 아직 밥을 먹기가 힘들다. 그래도 여행 가방을 풀어놓고 짐 정리를 마쳤다. 대충 집안 청소도 했다. 이제 사진 정리도 하고 여행기도 써야겠다.

 

몸과 마음이 이끄는 대로 치유와 회복의 시간이 지나가고 있다. 누구의, 어떤 것의, 어떤 사유나 가치나 신념의 구속에서부터 자유로운 상태다. 그냥 시간을 흘려보내다 보면 나의 몸과 마음은 자신의 길을 스스로 찾아 나서고 나다운 일상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것이 나의 자가치유 방법이다. 구속되지 않은 상태에서 내 마음과 영혼이 이끌리는 대로 이렇게 나를 풀어놓을 수 있고 기다려주는 환경이 있음에 그저 감사할 뿐이다.

 

올해 들어서만 네 번째로 지금까지 총 열 번째의 제주도 여행이었다. 제주도가 특별해서라기보다는 가족들과 함께 하는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의미에서 그냥 따라다니는 여행이다. 누군가와 같이 있다는 안정감을 느낄 수 있는 여행이며, 맛있는 음식을 같이 먹으며 이야기하는 시간을 즐기는 여행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