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세... 장애라는 광야를 떠돌던 40년을 마무리하며...
요즘 계속 머리가 텅 빈 상태에 빠져있는 것 같아 불편했다. 그 이유를 알 수 없어서 허둥대고 있다가, 서서히 마음 저변에서 올라오는 생각 하나를 발견했다. ‘이제는 장애라는 굴레에서 벗어날 때가 된 것 같다’라는 생각이다. 내가 나를 놓아주어야 하는 시기가 훨씬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무의식 속에서 장애를 벗어나지 못한 것 같다는 생각에 뒤통수를 맞은 것 같이 정신이 번쩍 든다고나 할까. 아니 번쩍 정신이 드는 것은 아니지만 서서히 정신을 차려야겠다는 생각이 일어나고 있다. 이러한 생각은 아마도 겨자씨 40주년 기념행사를 준비하기 시작하면서부터일 것이다.
겨자씨는 40년 전에 장애를 가진 여약사 친구들이 만든 모임이다. 가난으로 인해 교육의 기회를 놓치고 있는 장애학생을 돕고 싶은 마음으로 시작했다. 겨자씨 모임의 구성원은 모두 장애를 가지고 살아왔고, 장애로 인해 다양한 분야에서 차별을 경험한 사람들이다. 나 역시 장애 차별 경험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로 참여한 창립 멤버 중의 한 사람이다. 우리는 사회적 차별제도에 저항하는 길을 걷지는 않았다. 단지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으로 장애인의 자활을 직접 돕겠다는 소박한 목적을 세우고 실천하는 방법을 선택했다.
그런데 나는 여기에서 장애 해방은 아니지만, 또 다른 자유를 느낄 수 있었다. 가장 약자의 편에 서서 살기를 강요하셨던 아버지의 교육 영향으로, 어느 모임에 가든 내 마음과 감정이 약자에게로 향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는데, 겨자씨 구성원들은 나보다 약자가 별로 없어 보였다. 나는 당당하게 내 위치를 점령할 수 있었고, 있는 그대로의 나를 표현해도 존중하고 인정하며 받아들여지는 분위기였다. 장애를 가졌다고 특별히 주눅들 필요도 없었고, 장애를 가졌다고 특별 대우를 해 주는 구조는 더욱 아니었다. 일류대학 출신과 일류가 아닌 대학 출신이라는 같잖은 격차 외에는 그리 크게 이질감을 느낀 적이 없었다. 어쩌면 나는 이것을 즐겼는지도 모른다.
어찌 되었든 간에, 지금까지의 겨자씨 행적은 장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작은 몸짓이었음은 부정할 수 없다. 지난 40년 동안 우리는 ‘장애’라는 화두를 던져놓고 장애라는 광야를 떠돌았던 것이나 마찬가지다. 겨자씨라는 모임을 만들기 전부터 나는 이미 장애라는 노예 생활을 경험했다. 그 시절에는 장애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꿈도 꿀 수 없었고 희망을 가질 수도 없었다. 물론 핑계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정말 그랬다. 거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엄청난 발버둥질 끝에 겨자씨와 함께 장애의 광야에 들어섰고, 힘겨운 광야 생활 중에 소중한 친구들을 얻었다. 거친 광야 생활을 함께한 겨자씨 친구들과 더불어 만나와 메추리기를 맛보았고, 불기둥과 구름기둥의 보호 아래 40년이라는 세월을 지나왔다.
그리고 이제는 가나안에 들어와 ‘장애’가 특수성이 아니라 보편성에 가깝게 된 노년의 시기를 살고 있다. 나는 겨자씨 40주년 행사를 계기로 삼아 장애라는 문제에서 헤어나오려고 한다. 아직도 장애를 붙들고 집착하고 있다면 정말 심각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나 자신을 살펴보아야 함이 마땅하다. 장애인이면서 장애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도망 다녔던 것처럼 노인이면서 노화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거부하는 상황을 만들면 안 된다. 그러려면 장애에 대한 재해석이 필요한 것이 아니고 늙음에 대한 성숙한 이해가 필요하다.
노후를 즐기려면 장애인이라는 부정적인 정체성에서 벗어나 자연스러운 노인의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야 할 것 같다. 장애에 관한 이야기는 이제 그만 하고, 늙음과 어른에 대한 화두를 가지고 살 때가 되었다. 나는 장애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퍼포먼스로 장애 관련 책들을 다 버리려고 한다. 2년 후에는 작은 집으로 이사 갈 예정이니 그 준비로도 아주 적절한 행동이다. 이제부터는 어른답게 노년의 삶을 즐기고 싶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참 좋은 것 같다. 몸이 아픈 것만 빼면 자유롭고, 편안하다. 나는 이제 장애인이라는 화두를 떠나 노인이라는 화두에 몰빵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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