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별하지 않는다 / 한강 장편소설
현재와 과거, 개인의 삶과 역사적 사건이 얽히면서 인선과 경하라는 두 인물의 이야기가 전개된다. 특히 제주의 4,3 사건이라는 국가폭력으로 인해 파괴된 가족의 이야기 속에 사라진 사람들이 남긴 기억과 살아남은 사람들의 슬픔이 쌓여있다. 시간이 흘러도 상처와 고통은 치유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속에 스며든 사랑의 기억으로 죽음과 작별하지도 못한다.
작가는 직설적이거나 폭력적이지 않게 상실과 슬픔 속에서 평생을 살아온 이들의 고통을 그려냈다. 비극을 감싸는 듯한 부드러움과 애도를 품고 있는 문장의 흐름이 남다르다. 시적인 언어를 이해하기 어려운 나에게는 조금 벅찬 문장이다. 난해한 산문시처럼 읽혀지는 문장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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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걸 쓰려면 생각해야 했다.
어디서부터 모든 게 부스러지기 시작했는지.
언제가 갈림길이었는지,
어느 틈과 마디가 임계점이었는지.
어떤 사람들은 떠날 때 자신이 가진 가장 예리한 칼을 꺼내든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으로 안다. 가까웠기에 정확히 알고 있는, 상대의 가장 연한 부분을 베기 위해.
반쯤 넘어진 사람처럼 살고 싶지 않아. 당신처럼.
살고 싶어서 너를 떠나는 거야.
사는 것같이 살고 싶어서. p17
눈은 거의 언제나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그 속력 때문일까. 아름다움 때문일까? 영원처럼 느린 속력으로 눈송이들이 허공에서 떨어질 때, 중요한 일과 중요하지 않은 일이 갑자기 뚜렷하게 구별된다. p45
훅, 하고 뜨거운 게 명치에서부터 목구멍을 타고 올라오면 견딜 수 없었어. 집이 싫었어. 외딴집에서 버스 정류장까지 삼십 분 넘게 걸어야 하는 길도 싫고, 버스에 실려 도착하는 학교도 싫었어. 수업 시작을 알리는 <엘리제를 위하여>가 싫었어. 수업시간이 싫고, 아무것도 그리 싫어하지 않는 것 같은 아이들이 싫고, 주말마다 빨아서 다려 입어야 하는 교복이 싫었어. p77
멫번 오목가심을 문지르당 나왕보난 그 사름이 안 보여서. 어무 흔적도 어신 댓돌에 내가 앉앙 시퍼런 바당을 내당봐서. 꼭 그 사름 발소리가 다시 들릴 거 같아신디. 그걸 내가 기들리는 것인지 겁내는 것인지 알 수가 어섰주게. p232
눈을 뜬 순간 나를 놀라게 한 것은 어둠이다. 책에 얼굴을 파묻고 읽어가는 동안 이곳이 어디인지 잊은 거다. 그사이 바람이 멎은 것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곧 부서질 것처럼 덜컹댄 게 언제였느냐는 듯 침묵에 싸인 검은 유리창을 나는 멍하게 올려다 본다. 꿈속에서 문득 다른 꿈의 문을 열고 들어선 것 같은 정적이다. p233
소리가 그칠 때까지 우리는 입을 열지 않는다. 물살이 잦아들 듯 소리가 희미해진다. 차츰 음량이 낮아져 휘발하는 음악의 종지부처럼. 속삭이다 말고 문득 잠든 사람의 얼굴처럼 모든 것이 고요해진다. p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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