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지어 꽃향기 가득히
졸업이란 또 하나의 시작이라고 한다. 하나의 과정을 마무리하는 것은 삶의 다음 단계에 대한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더불어 그것을 추진하게 하는 원동력이 되어 또 다른 세계를 향해 도약하게 한다. 그래서 인생의 여정 중에는 졸업이라는 작고 큰 매듭들이 필요하다.
해마다 이른 봄이 되기 전에 졸업시즌을 알리는 꽃의 전령들이 많이 등장한다. 그 중에서 진초록색 줄기와 꽃받침 사이로 노란 모습을 앳되게 드러내고 있는 프리지어(Iridaceae, Freesia Safari)가 제일 먼저 내 눈에 들어온다. 프리지어는 본래 봄의 꽃으로서 하얀색, 분홍색, 보라색, 자홍색, 연청색 등의 다양한 색깔을 가지고 있으며 겹꽃도 있다.
좀 더 세밀히 살펴보면, 꽃망울이 살며시 열리는 어느 순간에 환한 웃음으로 다가오는 모습이나 개성 있는 색깔이 아름답기도 하지만 그 향기 또한 일품이다. 프리지어 꽃향기는 혈압을 안정시키는 효과가 있다고 한다.
꽃에서 나는 향기 중에 내가 가장 좋아하는 꽃향기가 프리지어 꽃향기이다. 프리지어 꽃향기 속에는 부드럽게 감싸주는 것 같으면서도 싸하게 아린 자극이 있고, 머무르는 것 같으면서도 굽이도는 흐름이 있고, 백색의 결백함 같으면서도 분홍색의 충만함이 있다. 이러한 느낌들이 어우러져 내게 주는 감동은 정신세계와 감성세계를 함께 빛나게 한다.
약국 앞을 지나면서 눈이 마주칠 때 마다 인사를 하곤 하던 여학생이 있었다. 가끔 학교생활이나 취업에 대한 이야기라든지, 친구 이야기 등 등을 들려주기도 하던 그녀가 바람이 차갑게 불던 어느 날 꽃향기와 함께 약국 안으로 들어왔다. 그 날 졸업식이 있었다고 말하며 선물로 받은 꽃다발을 자랑스럽게 들어 올려서 보여 주었다. 프리지어 꽃향기 가득히 담긴 꽃다발이었다. 그리고는 꽃다발에서 다 피지 않은 프리지어 한 줄기를 빼내어 나에게 주고 갔다.
나는 맑고 투명한 유리잔에 물을 사분의 삼 정도 채워 넣고 그녀에게서 받은 프리지어 한 줄기를 꽂았다. 그리고 조제실 한 구석에 올려놓았는데 그 다음부터 약국 문을 열고 들어오는 사람마다 코로 흠흠 냄새를 맡으며 미소 짓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무슨 향기냐고 물어오는 사람도 있었다. 꽃내음을 알아차리고는 어디에 프리지어 꽃이 있는지를 살펴보는 이도 있었다. 그리고 아픈 마음과 몸으로 왔다가 향기로 인해 웃는 얼굴로 돌아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단 한줄기 꽃에서 피어난 향기가 그 공간을 가득 메우고 또 문틈으로 새어나가 밖으로 밖으로 퍼져 나가고 있는 것이었다. 향기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또한 얼굴의 근육까지 움직이게 만드는 힘이 있는 것 같았다. 그 때 나는 ‘그래 나는 프리지어 꽃향기 같은 사람이 되어야지...’ 그렇게 되고 싶다고 염원했다.
나는 향기 가득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어디에 있는지 모습을 드러내지는 않지만 향기만으로도 그 꽃이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음을 알려 주듯이, 약이 필요한 사람에게 약을 건네며 주고 받는 따뜻한 말 한마디나 다정한 눈길로 내 삶을 증명해 보이고 싶었다. 아름다운 향기를 가득히 그리고 오래오래 나누어 주어 사람들이 미소 지을 수 있는 여유를 가지도록 돕고 싶었다.
그러나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 나는 꽃향기 같은 사람이 되어 있지 못하다. 그 뿐만 아니라 꽃향기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고 열망했다는 사실조차 많이 부끄러울 지경이다. 하지만 그 때 프리지어 꽃향기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나의 소망은 진실이었으며, 또한 이웃에 대한 관심과 사랑의 표현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삶에 대한 열정이나 원동력은 사람에 대한 관심과 애정에서 비롯되는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그렇다면 사람에 대한 애정은 어디에서 생겨나는 것일까? 자신에 대한 사랑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이 아닐까? 자신에 대한 진정한 사랑은 ‘우리’라는 공동체에 대한 사랑이 되고, 자신에 대한 끊임없는 호기심과 관심이 ‘이웃’에게로 넘쳐가고, 그래서 타인에 대한 열정이 또 다른 사건을 만들고, 사건들은 또 다시 에너지로 변하여 자신을 사랑하게 하고, 그리고 사람을 사랑하게 한다.
하지만 자신에 대한 사랑이 너무 허무하다는 것을 아는 나이가 되어 가면 타인에 대한 관심과 사랑도 허무하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 같다. 자신에 대한 관심과 사람에 대한 관심이 적어지니까 열정이 없어지고, 열정이 없어지니까 차가운 늙음이 감지된다. 그렇다고 세월을 탓할 수는 없다. 또한 척박한 상황을 탓하지도 못한다. 사람에 대한 사랑이 나에 대한 사랑만큼이나 허무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을 사랑하여야 한다. 사랑의 끈, 관심과 애정의 끈을 놓치면 안 된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을 중지한다는 것은 삶을 방치하는 것이 될 뿐이다.
나와 타인에 대한 관심을 버리지 말자. 끊임없이 이웃을 생각하고 관심을 기울이자. 이것만이 삶을 살아갈 수 있는 힘임을 잊지 말자. 그리고 지금은 비록 꽃향기 같은 삶을 살아가지 못하고 있더라도 그냥 꽃향기를 맡으면서 미소 지을 수 있는 여유만으로도 감사하자. 사랑하는 가족이나 친구 그리고 이웃과 함께 차 한 잔 나누며 꽃향기에 관한 추억을 나누는 것만으로도 감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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