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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마음에서 피는 꽃] 한 줄기 난 꽃대로부터 오는 행복

truehjh 2006. 3. 12. 23:01

한 줄기 난 꽃대로부터 오는 행복

 

해마다 나에게 꽃을 피워 주는 고마운 난 화분이 있다. 그 화분에서 몇 줄기의 난 잎 사이로 꽃대 하나가 살며시 올라오기 시작하면 나는 그것을 발견하는 순간부터 기대감에 부풀기 시작한다.

 

미세한 바람에도 떨리는 듯 보이는 난 잎 사이로 꽃대 한대가 솟아 나오면, 연두색의 봉우리가 그 꽃대로부터 살며시 고개를 내민다. 연약한 듯한 녹색의 꽃대에서 투명한 담록색의 꽃봉오리가 맺히고, 다시 유백색의 꽃으로 피어난다. 그것은 아주 깨끗하고 맑은 꽃잎으로 열리면서 은은한 향기를 내어 준다. 이 때가 바로 청초한 난 꽃과 그윽한 난 향과 가늘고 긴 난 잎이 어우러지는 순간이다.

 

꽃대 끝에 꽃망울의 모습을 드러낸 후에 조금만 더 기다리면 꽃봉오리가 열리면서 무슨 이야기인가를 시작하는 것 같아 보인다. 귀 기울이고 숨죽이고 잠시 집중해 본다. 아무 소리도 없다. 다만 살며시 웃고 있을 뿐이다. 이렇게 조용히 피어나고 있는 꽃송이들은 화려하지도 않으면서, 자신의 모습을 또렷하게 드러내고 있다. 난은 그렇게 지조와 품위를 지키며 단아한 자태로 한 폭의 동양화처럼 서 있다.

 

동양화의 수묵사군자 중의 하나로 자리 잡고 있는 난을 그리는 정경을 상상해 보자. 그림을 그리는 사람의 마음과 정신이 먹과 붓을 매개로 해서 화선지 위에 옮겨지면 난 잎의 곡선이 드러난다. 그리고 꽃대와 꽃잎과 봉오리가 형태를 갖추어 가게 되면, 선을 따라 흐르는 바람과 숨결과 빛이 어우러지는 아름다운 조화를 엿볼 수 있게 된다.

 

정성스럽게 그려진 한 폭의 그림 속에는 난 잎을 흔드는 미세한 바람이 있고, 난 꽃의 은은한 향기가 있고, 숨은 배경이 되어 있는 태양이 있고, 든든한 나무의 그늘이 있고, 흔들리지 않는 바위와 흙과 물과 미생물이 있다. 살아있는 생명을 그렸기 때문에 눈에 보이지는 않아도 그 모든 것들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동양란이란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일본, 중국, 대만 등의 온대성 기후에서 자라는 난이라고 한다. ‘난은 고요함이 꽃으로 되니 그 품위가 깊고 그윽하다라고 했던 어느 중국 시인의 표현처럼 화려하지 않으며 은은한 향을 가지고 있다. 특히 난이 지니는 엽선의 흐름 하나하나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되면 그 선의 미에 매료되지 않을 사람은 없는 것 같다. 이러한 정적인 아름다움이 동양란의 특징일 것이다.

 

지금 내 옆에 있는 난은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동양란 중의 하나이다. 단지 내가 날마다 보아주고, 이야기를 나누며, 사랑을 기울이고 있다는 사실로 인해 특별해진 것이다. 어느 사이엔가 예고 없이 솟아오르는 난 꽃대를 보게 되면 나는 저절로 행복해 진다. 하나의 꽃대에서 5-7송이의 꽃을 피우고 있어서 화려함이나 풍성함은 없어도 단출한 꽃송이에서 깊고 충만한 행복을 느낄 수 있어 좋다. 그리고 오래도록 내 곁에서 수수하게 꽃을 피우고 있어 나는 행복함을 느낀다. 한 줄기 난 꽃대로부터 오는 행복이다. 행복이란 이런 것이어야 할 것 같다.

 

작은 풀 한 포기의 숨결에서도 살아있음에 대한 감사함이 느껴지는 것이 행복이다. 소유하지는 않았더라도 존재하는 것만으로 감사할 수 있는 것이 행복이다. 서로의 삶이 비록 연약할지라도 지켜보아 주고, 인정해 주고, 바라보는 사람이 있다고 느껴지는 것이 행복이다. 변하지 않는 사랑에 대한 고마움, 늘 그곳에 서 있으리라는 믿음과 확신으로 인한 고마움은 단순하면서도 명쾌한 행복이며, 어렵거나 복잡하지 않은 행복이며, 늘 주위에 존재하는 행복이다.

 

우리가 바라는 행복이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가. 우리가 느끼고 싶은 행복이란 무엇일까. 행복은 오래된 나뭇가지에서 작게 눈터오는 새로운 가지의 연록색을 발견했을 때의 기대감 같다고나 할까.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게 속으로 기운을 차리는 차분한 봄으로 인해 오늘은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