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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마음에서 피는 꽃] 한 여름 이른 아침의 나팔꽃

truehjh 2006. 8. 1. 21:49

한 여름 이른 아침의 나팔꽃

 

한 여름 이른 아침에 싱싱하게 피어나는 나팔꽃 한 송이를 만나면 정말 반갑다. 활짝 핀 나팔꽃이 나에게 인사를 건네는 것 같아 반가운 마음으로 나도 인사를 건네곤 하던 어린 시절의 여유로운 아침이 생각나기 때문이다. 요사이도 길가나 담 옆에서 나팔꽃을 발견하게 되는 날이면, 마음속으로 한 송이의 꽃과 정다운 아침인사를 주고받는다. 찬 이슬 머금고 아침 햇살 가득히 담고 있는 꽃의 모양이 참으로 싱그럽다.

 

주위에 있는 나무나 다른 식물을 감아 올라가며 뻗어 나온 줄기와 진녹색 잎들 틈에 환하게 피어나는 나팔꽃(Pharbitis nil Choisy)은 메꽃과(Convolvulaceae)에 속하는 한해살이 덩굴식물이다. 줄기는 덩굴성으로 다른 식물이나 물체를 감아 올라가면서 길이 3m 정도로 자란다. 깔대기 또는 나팔 모양의 꽃은 7~8월에 피며 청자색, 홍자색, 흰색, 분홍색, 붉은색 등의 색깔로 핀다. 열매는 삭과로 익으며, 긴 잎자루를 가진 잎은 어긋나게 나오고 표면에 털이 있다. morning glory라는 영어이름을 보아서 짐작할 수 있듯이 이른 아침에 피어나는 꽃으로 한 여름부터 그 여름이 끝날 무렵까지 피고 진다.

 

나팔꽃은 해가 짐과 동시에 개화작업에 들어가 새벽 4시쯤부터 꽃망울이 열리기 시작해서 5시가 되면 완전히 꽃이 피고, 아침 햇볕 아래 3~4시간을 보낸 뒤 오므라지기 시작한다. 이처럼 이른 아침에 피었다가 오전이 지나면 오므라드는 현상은 햇빛과 관계가 있다고 한다. 즉 빛에 따라서 꽃잎의 안쪽과 바깥쪽이 자라는 정도가 서로 다르기 때문이란다. 그래서인지 태양이 중천에 걸리기 시작하면 나팔꽃은 벌써 고개를 숙이고 시들은 꽃이 되어있어 보는 이의 마음을 안타깝게 한다.

 

뜨거운 햇살을 견디지 못하고 지쳐버린 것 같은 나팔꽃의 모습은 마치 더위에 축 늘어져 있는 우리네 모습과 비슷하다. 더 이상의 의욕도 낼 수 없도록 마냥 지쳐버리게 하는 폭염 아래서는 일의 능률이 오르지 않는다. 그래서 모든 이들은 더위를 핑계 삼아 어디론가 떠난다. 바로 시원한 계곡이나 그늘 진 곳을 찾아다니며 더위를 피하거나 또는 반대로 외딴 섬이나 바닷가를 찾아가서 적극적으로 더위를 즐기는 것이다.

 

피서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면 더위의 한 가운데 서서 그 더위를 잊어야 했던 20대 중반 한 여름의 기억을 빼놓을 수 없다. 그 때는 시원한 계곡이나 바닷가로 여름휴가를 떠날 수 있는 사람만 보아도 부러워하곤 하던 때였다. 또한 에어컨디션이 대중화 되어 있지 못하여서 덜덜거리는 선풍기 한 대를 독차지 할 수 있다면 그것도 행복이라고 여겨야 하는 시절이었다.

 

물론 행복에 대한 물질적인 기대치가 낮은 사람들의 행복지수가 더 높더라는 통계가 있기는 하지만, 나는 그 당시 직장 초년병이어서 휴가를 낼 수 있다는 기대치가 전혀 없던 터라 고작해야 어떤 방법으로 더위를 이길 수 있을까를 연구해 볼 따름이었다. 그러다가 결국 나에게 맞는 한 가지 방법을 고안해 냈다. 그것은 무엇엔가 몰두하면 더위를 잊을 수 있다는 생각 즉 이열치열의 방법으로써 책에 빠져서 더위를 잊자는 전략이었다. 그리고 곧 그 전략을 실천에 옮겼다.

 

그때 선택한 것이 대망전집이었다. 400쪽 분량의 책 20권을 독파하면서 느꼈던 시원함이란 팥빙수 이십 그릇 보다 더 달콤하고 짜릿했다. 그 해 여름을 그렇게 보냈다는 뿌듯함으로 인해 독서에 알맞은 계절은 가을이 아니고 여름이라는 어설픈 주장까지 내세우기에 이르렀고, 해마다 피서방법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기만 하면 나는 그냥 자랑삼아 독서피서법에 대한 이야기를 하곤 한다. 물론 시원한 여름휴가여행을 떠나지 못한 것에 대한 변명처럼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지금 그 여름을 뒤돌아보면 한 송이 싱그러운 피서의 꽃을 피워냈다는 상쾌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이 뜨거운 여름과 관련이 있는 우리네 정서는 바로 피서. 그러므로 더위를 피해 어디론가 떠나 보는 것도 행복이라고 여겨진다. 또한 더위와 대면해서 당당하게 맞서는 것도 나름대로의 즐거움이라고 여겨진다. 계속되는 폭염 속에 축 늘어져 있는 오후의 나팔꽃처럼 일상을 지내지 말고, 나름대로의 피서법을 터득하여 이른 아침 찬 이슬 머금은 싱그러운 나팔꽃처럼 오고 가는 사람들에게 싱그러운 웃음을 선사할 수 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