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스민꽃차 한 모금
왠지 나른하면서 생각이 복잡해질 때는 커피가 마시고 싶어진다. 뭔가 허전한 기분이 들어 심난할 때도 커피가 생각난다. 그윽한 향과 은근한 맛을 상기하면서 커피를 마시고 나면 에너지가 충전된 듯한 만족감을 가지게 되는 것은 비단 커피중독자가 아니더라도 느낄 수 있는 느낌이다.
그러한 만족감은 카페인의 다양한 긍정적인 약리작용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자세히 알고 보면 커피라는 기호품에는 긍정적인 면만 있는 것은 아니다. 뼈에서 칼슘을 빼내는 작용이라든지, 수분을 배설시키는 이뇨작용, 또는 위벽에 자극을 주는 등의 부정적인 면도 있다고 하지 않는가. 나는 그러저러한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 커피 대신 즐길 수 있는 차를 찾아보려고 했지만 그 일이 그리 쉽지가 않았다. 그러던 중에 자스민꽃차를 만나게 된 것은 나에게 또 하나의 작은 삶의 기쁨이었고 위로였다.
자스민은 청초한 꽃 모양이 의외라고 할 정도로 뛰어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는 꽃이다. 또한 매우 독특한 향을 지니고 있어서 ‘꽃 향유의 왕’으로 불리며 사랑의 묘약으로 오랫동안 사용되었으며, 인도에서는 향고(고약)제와 의식용으로 널리 사용되었다. 자스민의 꽃차는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꽃차이기도 하다. 자스민의 독특한 향이 신경을 편안하게 만들어 주어서 우울한 기분을 전환시켜 준다고 한다. 그렇게 생각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쟈스민꽃차 한 모금을 마시면 금방 기분이 좋아진다.
내가 주로 마시는 차는 우롱차 98%에 2%의 자스민 꽃잎이 첨가되어 있는 것인데 엄밀하게 말하면 자스민꽃차가 아니지만 나는 이 차를 자스민꽃차라고 명명했다. 은은한 향과 감미로운 맛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자스민꽃차를 마시면서 내가 감지할 수 있는 좋은 점을 몇 가지 들어 본다면, 먼저는 찻잔에서 느껴지는 따뜻한 온감이 좋고, 둘째는 은은한 향기가 좋고, 셋째는 혀에서 느껴지는 깔끔한 맛이 좋고, 다음은 위에 부담되지 않을 것이 기대되어서 좋다.
그리고 빼놓을 수 없는 이유가 하나 더 있는데 그것은 아름다운 한 장면이 떠올라 행복해진다는 것이다. 오밀조밀하게 핀 자스민꽃 여러 송이를 머리에 꽂고 꽃의 도시로 기억되는 샌프란시스코의 거리를 활보하던 장면이다. 그 때의 여행은 낭만적인 행복과는 거리가 먼 내 인생의 밑바닥 같은 절망의 상황에서의 여행이었지만 지금 추억해 보면 그러한 절망의 상황도 다 필요한 인생훈련이 아니었던가 싶다. 그래서 고통보다는 자스민의 흰색 꽃잎의 추억이 더 강렬하게 남아있나 보다.
오래전에 나는 미국에 잠시 머물러 있던 시기가 있었다. 그러니까 남의 땅에서 발 좀 붙이고 살 수 있을까에 대한 궁리가 한참일 때라고 말 할 수 있다. 힘들게 준비하던 시험을 마치고 미국에서 오랫동안 살고 있던 여고동창인 친구와 함께 여행을 떠났다. 샌프란시스코의 오르막 내리막 언덕이 있는 도로에는 전철이 다니고, 그 길가에는 여러 가지 색깔의 꽃들이 많이 피어 있었다. 그 중에서 작은 풀꽃 같이 청초하게 피어있는 하얀색의 자스민 꽃이 유독 내 마음을 사로잡았던 것 같다. 아마도 시험을 치루고 난 후에 떠난 여행길에서 만났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난 그 소박한 꽃 몇 송이에 위로를 받았다. 꽃의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꿈을 꾸고 있던 시절에, 만족할만한 시험결과를 내지 못한 상황에서, 오랜 시간의 노력이 물거품으로 돌아갈 것이 예측되는 고통스러운 시간에, 나의 미래가 너무도 막막하여 헤매고 있던 그 순간에 만난 깊은 위로였다.
그러고 보면 우리의 기억은 믿을 만한 것이 못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좋았다거나 또는 나빴다고 말 할 수 있는 기억은 상황이 변하면 따라 변한다. 그 순간 아름다웠다거나, 행복했다라는 느낌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퇴색되어 가기도 하고, 슬펐다거나 고통스러웠다라는 흔적은 더 깊은 상처로 남겨져서 영원히 잊지 못할 아픔으로 존재하게 되기도 한다. 그러나 즐거웠던 기억들은 희미해져 가는데 괴로웠던 기억들은 날로 새롭게 선명해져 온다면 그 기억은 아직 치유되지 않은 상처로 남아 있음을 뜻한다.
상황이 달라질 때마다 그 아픈 기억이 되살아나 고통스럽게 된다면 치유되지 않은 상처에 대한 재해석이 필요해진다. 절망의 상황이었지만 돌이켜 보니 나를 성숙시키는 훈련의 기간이었다고 재해석할 수 있는 용기가 절실하게 필요하다. 그리고 계속해서 긍정적인 재해석을 해 나갈 필요가 있다. 긍정적 재해석은 심리학에서 말하는 재명명(relabeling)과 비슷한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부정적이고 바람직하지 못한 감정들에 대해 긍정적의미를 부여하는 것을 말한다.
지나가 버린 가슴 아픈 사건에 대한 재해석이야말로 그 상처를 치유해 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믿는다. 이러한 재해석의 방법은 아프게 간직하고 있는 삶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권해 봄직한 방법이다.
꽃과 연결되어 추억할 수 있는 장면을 많이 가지고 있으면 행복할 수 있는 기회도 많아질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물론 꽃과 연결되어 있는 기억이라고 다 행복한 장면은 아닐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꽃을 매개로 하여 슬펐던 기억을 좀 순화시키면서 긍정적인 재해석을 가능하게 할 수도 있을 것 같아 이렇게 억지를 부려본다. 자스민꽃차 한 모금을 마시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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