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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마음에서 피는 꽃] 채송화를 통한 사색

truehjh 2006. 7. 5. 22:32

채송화를 통한 사색

 

채송화(Portulaca grandiflora)는 쇠비름과에 속하는 1년생 초화류다. 남아메리카가 원산지로 키는 20cm 정도이며 가지가 여러 갈래로 갈라지면서 가늘고 긴 원기둥 모양의 육질 잎이 서로 어긋나게 나온다. 7~10월에 갈라진 줄기 끝에서 한 송이 또는 두 송이씩의 꽃이 피는데 백색, 자주색, 홍색, 황색 등 다양하고 선명한 색의 꽃잎을 가지고 있다. 채송화 꽃잎의 화려한 형광색들 중에 유난히 하얀색 채송화 꽃송이가 빛나게 돋보인다. 흰색 꽃에는 도도함이 없는 아름다움, 연약한 모습이지만 그러나 저만의 모습을 자신 있게 드러내는 당당한 아름다움이 있다.

 

꽃은 아침에 봉오리였다가, 정오쯤이 되면 활짝 피고, 오후에는 오므라들면서, 저녁에 진다. 하루를 살고 지는 꽃 한 송이의 짧은 수명이 안타깝기 그지없지만 삭과에 속하는 열매가 맺히면 그 속에 많은 씨앗이 여문다. 씨앗은 좁쌀크기보다 더 작으며 광택이 나는 흑색이다. 하얀색 꽃 뿐 아니라 각 색의 꽃들이 계속해서 피고 지다 보면 어느 사이엔가 어느 틈엔가 오동통한 씨집이 모습을 드러낸다. 색이 변해가면서 영글어 가고 그 속에서 작은 씨앗들이 저마다의 세상을 꿈꾸며 한 순간을 기다리는 것이다. 그리고 어딘가로 흩어져 나가 땅 속에 자리를 잡고 다시 움터 올라 올 준비를 하게 되겠지...

 

태양이 한가운데쯤 머물러 있는 정오가 지나면서 담 밑으로 조금씩 그늘이 드리우기 시작한다. 어느 순간에 그늘진 땅이 한 뼘이었다가 다시 두 뼘쯤 되고 또 그 정도의 면적이 늘어난다. 담에 의해 생긴 그늘은 너무도 선명하게 양지와 구분된다. 그 음지의 경계선을 넘어서면 작열하는 태양 아래로 이글거리는 기운이 감도는 양지다. 아무도 그 경계선을 넘으려하지 않는다. 뜨거운 햇볕 속으로 들어가면 피부가 따가워지고 더위도 먹어 고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작은 아이가 툇마루에 앉아서 그늘이 만들어지기를 기다리고 있다가 자신의 조그만 몸을 가릴만한 음지가 생기는 시각쯤에 담 밑으로 걸어 나온다. 그리고 아직은 따끈따끈 하지만 그늘진 비좁은 땅을 찾아 앉는다. 뙤약볕에 앉아 있다고 엄마에게 꾸중을 듣지 않아도 되는 성역이 바로 담 밑 그늘이라는 것을 그 아이는 알고 있다.

 

작은 아이는 종이 한 장을 들고 쪼그리고 앉아 무엇인가를 찾기에 여념이 없다. 바로 잘 여문 씨집이다. 집이 터져버리면 흩어지는 작은 알갱이 씨앗들을 모으기가 힘들다. 땀난 손에 묻으면 잘 떨어지지도 않지만, 떨어지면 줍기도 힘들다. 그래서 흰 종이 한 장을 준비하고 며칠 동안을 눈여겨보면서 잘 여물기를 기다리고 벼르다가 때가 되었다고 느껴지는 순간에 종이를 받치고 손가락 끝으로 살짝 건드리는 것이다. 그러면 흰 종이 위로 반짝반짝 빛나는 까만 씨들이 쏟아진다. 탁 터지며 흩어지는 바로 그 순간의 느낌이 너무 상쾌하다. 어린아이가 느낄 수 있는 신비로움과 경이감으로 가득한 순간이다.

 

뜨거운 여름날에 집 마당의 담 밑 그늘에 나와 앉아서 채송화 꽃밭을 구경하고 있던 어릴 적의 내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예전엔 시멘트 벽돌 담을 따라 줄기가 퍼지면서 담 아래 부분을 장식하고 있는 채송화 무리를 흔하게 볼 수 있었다. 낮게 퍼져나가는 채송화의 특성으로 인해 땅에 쭈그리고 앉아야만 꽃과 줄기들을 자세히 관찰하며 살펴 볼 수 있었는데, 나는 씨집이 터지는 순간을 포착하기 위해서 바짝 마른 듯한 오후가 되면 담 밑에 웅크리고 앉아서 채송화 씨집 터트리기에 열중하곤 했다. 아마도 나는 채송화 꽃씨들을 통해 혼자만의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뛰쳐나가는 통쾌함과 대리만족감을 느끼곤 했던 것 같다.

 

하지만 그 작업은 기다림에 대한 훈련이었고, 그리고 기다림 저편에 있는 미지의 세계에 대한 사색의 시간이었다. 작은 씨들이 온 세상에 흩어지면 온 땅이 채송화 꽃밭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어린아이다운 상상은 아주 오래 전의 기억으로 남아 있을 뿐이지만, 지금의 나는 작은 꽃씨를 통해 또 다른 우주를 본다. 생명의 작은 부분을 통해 다시 확산되어 가고 있는 세계가 보인다. 하나의 우주였던 꽃 한 송이가 이제 씨가 되어 수많은 우주로 분화되어 가는 것이다. 그 작은 씨앗 하나하나가 저마다의 세계를 이루고, 머지않아 다시 한 송이 꽃이 되어 세계를 낳을 준비를 하게 될 것이다. 생명의 기운, 그 활발한 에너지가 발생하고 확산되면 흩어지는 세계 또한 우주의 한 부분으로써 또 하나의 우주가 될 것이다.

 

사람도 다를 바 없다. 작은 씨앗이 흩어져 나가듯, 인간의 의지가 고개를 들 때 인간은 실존적으로 버려진 자, 내동댕이쳐진 자로 인식되어 스스로를 분리시킨다. 그리고 하나의 개체로 독립하면서 무력감과 불안을 체험하게 된다. 하지만 자신의 개체적 생명을 초월해서 전체와의 합일을 찾아내려는 끝없는 열망을 가지고 있다. 우주와의 합일에 대한 열망이다. 그래서 결국은 하나로 합일되며 또 여러 개로 분산되는 조화의 세계를 이루게 될 것이다. 조화로운 세계야말로 우리가 꿈꾸어야 하는 세상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