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톱에 물든 봉숭아
내가 사는 아파트 입구에 조그만 화단이 있다. 화단이라고 말하기는 좀 어설픈 공간이지만 그래도 그 곳에서는 나무들과 함께 여러 가지 화초들이 자라고 있다. 키가 무릎까지 자란 봉숭아뿐만 아니라 과꽃, 맨드라미, 백일홍 등과 같은 소박한 꽃들이 어울려 살고 있다. 우리 아파트에 거주하시는 연세 지긋하신 분이 이런 저런 꽃들을 어디선가 구해다 심어 놓으셨나 보다.
평소에는 그 곳에 무슨 꽃이 심어져 있는가를 눈여겨보지 못하고 지냈다. 헌데 오랜 비가 그친 몇 일전 평소보다 일찍 집으로 들어오던 날에 빨갛게 피어있는 봉숭아꽃을 발견했다. 크고 싱싱한 잎 사이로 붉은색 꽃들이 많이 피어있었다.
봉숭아의 붉은 빛이 나쁜 기운을 쫒아내고 질병을 막는다고 하여 예전에는 장독대 옆이나 울 밑, 뜨락에 심었다고 한다. 손톱에 봉숭아물을 들이는 것도 거기에서 유래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봉숭아는 봉선화(Impatiens Balsamina)라고도 불리는데 꽃 모양이 마치 봉황새 같다고 하여 중국에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더 많이 사용하고 있는 친숙한 이름은 봉숭아이며, 꽃 색깔은 분홍색, 빨간색, 주홍색, 보라색, 백색 등이 있고, 꽃 모양도 홑겹, 겹꽃이 있다. 씨방은 털이 많이 나있고 씨앗주머니가 돌돌 말리면서 터지면 황갈색 씨가 나온다.
소녀시절을 보내고 난 사람이면 누구나 다 기억할 것이다. 그 시절에 봉숭아 물들이는 일은 누구네 집에서나 일어나는 연례행사였다. 물들일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날을 정하면, 봉숭아꽃과 잎을 따다가 적당한 비율로 섞어서 잘 찧어 놓는다. 그리고 집안 어느 구석에선가 백반을 찾아 그것을 가루 내어 조금 섞어 넣으면 재료는 완성된다. 잘 버무려진 것을 손톱 위에 올려놓고 커다란 나뭇잎으로 손가락 끝을 감아서 무명실로 매어 놓는다. 과연 성공할 것인지 실패할 것인지가 궁금해서 자꾸 들여다보다가 잠이 든다.
그렇게 하루 밤을 자고 나면 눈을 뜨자마자 손가락에 몇 개가 남아있는지를 먼저 확인한다. 자는 사이에 열 손가락에 감겨있던 것 중 몇 개는 빠져나가고 남아 있는 것들을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벗겨내면 쪼글쪼글해져 있는 손가락 끝에 붉게 물들어 있는 손톱이 드러난다. 원하는 만큼 붉게 물들지 않았거나 희미할 경우 일주일 후에 다시 한 번 더 들이면 예쁜 봉숭아물 들인 손톱이 된다.
긴 여름방학이 끝나고 개학을 맞이하면 학교로 돌아온 여자아이들의 손톱에는 거의 봉숭아물이 들여져 있다. 여럿이 만나면 누구 손톱의 봉숭아 빛깔이 고운지, 봉숭아 물빛이 더 길게 남아있을 아이가 누구일지, 열손가락에 다 물을 들였는지, 아니면 양손에 두개씩만 물들였는지가 이야기의 화제가 되곤 했다.
이보다 더 어릴 적 소꿉놀이 하던 시절에도 봉숭아와의 인연을 빼놓을 수 없다. 한적한 공터에 조그만 아이들 몇 명이 모이면 엄마, 아빠 놀이를 했다. 이 때는 주로 손톱에 봉숭아 물 들인 아이가 엄마역를 맡았다. 이렇게 엄마와 아빠가 결정되면 한 두 살이라도 어린 동생이 어김없이 그 집의 학교 가는 아이가 된다. 우리의 집터와 남의 집터가 잡히면 큰 돌 몇 개로 방과 대문, 그리고 이웃집을 경계 지어 놓는다.
살림도구는 풍족하다. 땅에 널려있는 돌과 깨진 독 조각, 기와장 파편 등을 주어다가 진열해 놓으면 그것으로 족하다. 이렇게 밥그릇과 접시, 칼과 도마가 준비되면 금방 아침식탁을 마련한다. 그런데 밥상에 올라온 음식이 가관이다. 땅바닥을 긁어서 모래흙을 만들면 그것이 쌀이 되고 밥이 된다. 봉숭아 꽃잎과 잎파리를 따다가 손으로 뜯어 놓고 빨간 벽돌조각 갈아서 가루 내어 만든 고춧가루 뿌리고 물을 넣으면 김치가 된다. 넓적한 기와장 파편을 도마 삼고 뾰족한 돌을 칼 삼아 여러 가지 풀잎들을 썰어 놓고 맛난 반찬 만들어서 널빤지 위에 차려 놓으면 훌륭한 성찬이 된다.
엄마역을 맡은 아이는 목소리조차 엄마 흉내를 내면서 집안의 대소사를 다 챙긴다. 그 때의 대소사란 학교 가는 아이에게 학교 가방 메어주고, 회사 가는 남편아이 직장 가방 들려주고, 옆집 가서 놀다가, 식구들이 돌아오면 저녁에 밥 차려 같이 먹고 뭐 그런 것이 전부였던 것 같다. 아빠는 회사 가고, 엄마는 밥 차리고, 아이는 학교 가고, 이런 것이 삶의 전부인줄 알았던 시절이었다. 이렇게 간단명료하고 소박한 것이 인생이라면 얼마나 행복할까.
뙤약볕 아래서 놀던 그 어린 시절이 눈에 선하다. 그때는 엄마, 아빠 놀이가 왜 그리 재미있었던지 모르겠다. 해지는 줄 모르고 놀다가 그 중 한 아이가 진짜 엄마에게 야단맞으며 불려 들어가고 나면 그 때 소꿉놀이는 기약도 없이 끝나는 것이다. 이름도, 얼굴도 기억나지 않지만 그렇게 재미있게 놀던 장면들이 추억 속에 여전히 남아 있다. 그들은 모두 진정한 엄마와 아빠가 되어서, 아니 이제는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되어서 어디에선가 행복하게 잘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나처럼 빙그레 웃음 지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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