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꽃과 화장
호수같이 맑고 파란 하늘로 인해 가슴 설레는 달 10월이다. 파란 하늘과 하얀 구름이 어찌나 잘 어울리는지, 머리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는 시간이 많아진다. 올려다보고 또 올려다보아도 하늘의 아름다움과 투명함이 덜해지지 않으니 보고 싶은 마음을 어찌 그칠 수가 있단 말인가. 구름 따라 내 마음도 이곳저곳 떠돌다 머물고, 머물다가 떠도는 순례를 계속하면서 이처럼 시간을 보내곤 하는 것이 여러 번이다.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하얀 구름의 모양 따라 그리움의 대상도 바뀌고, 흐르고 변화하는 구름의 크기에 따라 그리움의 양도 커져만 간다. 흰 구름의 움직임에 나를 맡기다 보면 이번 가을에는 사랑해야지, 이번 가을에는 여행을 해야지, 이번 가을에는 그림을 시작해야지, 이번 가을에는 무엇인가를 이루어야지 등등의 결심을 많이 하곤 하는데 아마도 감상적인 분위기에 의해 순간적인 결심을 하게 되는 것 같다. 그래서인지 언제나 그 결심들은 공수표로 돌아가 새해 첫 달 첫 날에 하는 다짐과 진배없이 생각으로만 그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 중 하나가 화장을 하겠다고 다짐하는 것이었다. 화장도 안한 맨 얼굴로 지내다가도 해마다 가을이 오면 이 가을엔 꼭 화장을 해야겠다고 벼르다가 그냥 보내곤 한다. 하지만 아주 어린 시절에는 화장에 대해서 관심이 많았던 적이 있다. 그 당시에는 분가루, 코티분, 크림이란 말들이 꽤나 어른스러운 단어들이었고, 어린 소녀의 상상 속에서는 아름다운 여인을 표현할 때 사용되는 용어 중에 하나로 여겨져서 더욱 호기심을 자극했던 이름들이었다. 분꽃을 아는가. 분꽃이란 이름의 꽃을 알고 있는 사람이 아주 많을 것 같지는 않다.
분꽃은 6~10월 즉 초여름부터 가을이 될 때까지 은근하게 향기 나는 꽃을 피운다. 해질 무렵에 펴서 아침까지 피어있는 분꽃은 가지 끝에 몇 송이씩 모여서 피며 붉은색, 흰색, 노란색 등이 있다. 또한 여러 가지 색이 섞인 꽃도 있다. 분꽃이 떨어지면 그 자리에 동그란 열매가 맺히는데 처음에는 녹색이었다가 가을이 되면 검은색으로 변한다.
그것이 잘 마른 후에 쪼개보면 하얀 가루가 나온다. 아마도 씨앗에 분가루 같은 고운 녹말이 있어서 이름이 분꽃이 되었나 보다. 예전에는 이 분말을 분가루 대용으로 사용한 적이 있다고 하는데, 내가 어렸을 적에는 화장품이 그리 흔하지 않은 시절이었기에 꼬맹이 아가씨들이 모여 분꽃 가루로 단장하고 어른 흉내를 내면서 놀곤 했다.
화장하는 것은 여자가 갖추어야 할 예의라고 하며 화장을 강조하던 시절도 있었는데 요즈음은 남자도 화장을 하는 시대라고 하니 이제 더 이상 화장이 여자만의 소유는 아닌 것 같다. 하긴 최근에는 생얼이 인기라고도 한다. 하지만 생얼이란 말은 화장하지 않은 얼굴 자체라기보다는 화장하지 않은 듯 하게 화장을 한 얼굴을 표현하는 말이라고 하는 것이 더 맞을 것 같다.
사람은 얼굴에 화장을 하듯이 마음에도 화장을 하여야 할 필요가 있다. 마음의 화장이란 자신의 내면의 모습을 성찰하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좀 더 투명하게 자신의 내면을 관찰하면서 왜곡된 의식이나 비뚤어져 있는 마음과 생각들을 고치고 다듬어서 아름답게 만드는 것을 의미한 다.
우리는 지금 개인의 자유가 존중되어야 하며 다양한 형태의 개성이 용납되어져야 한다는 세대를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외부에서 오는 간섭이나 통제를 철저하게 거부하면서 살고 있으며 연장자라는 이유로 또는 선배나 부모, 상사라는 이유로 조정하거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을 무엇보다도 싫어한다. 또한 획일성을 거부하며 자기 내부로부터 시작되어야 하는 절제마저도 삶을 자유롭지 못하게 한다는 이유로 거부한다.
그러나 이런 때일수록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일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더 깊은 내면의 성찰이 필요하다. 주변의 환경이 급속하게 변화하고 있고 따라서 받아들여야 하는 정보가 넘치는 상황 속에서는 외부의 반응에 민감해야 하기 때문에 내면의 성찰이 어느 때 보다도 중요하고 가치 있게 다루어져야 한다.
아침에 일어나 화장을 하면서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확인하고 매일의 일과를 시작하듯이 오늘은 마음의 화장을 하고 하루를 시작하여야겠다. 그리고 누군가가 내게 오늘 특별히 아름다워 보인다고 말해 준다면, 그러면 살며시 웃어 주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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