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피아 로렌과 해바라기
내가 초등학교 다닐 때만 해도 우리 동네에 있는 집들은 작은 꽃밭 하나씩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물론 작은 꽃밭이란 잘 꾸며 놓은 아담한 정원이 아닌 그야말로 한두 평 남짓한 마당의 한 구석을 말하는 것이다. 내가 살던 곳은 서울의 변두리 지역이어서 논과 밭을 쉽게 찾아 볼 수 있는 지역이었고, 콘크리트벽만 바라보고 있을 정도로 도시화되어 있는 곳은 아니었다. 그래서 풀들이 살만한 작은 공간이면 어디라도 꽃밭이 될 수 있었다. 앞마당, 뒷마당, 담 밑 또는 길옆, 하다못해 어느 집에나 있는 하수구 옆에라도 채송화, 봉선화, 백일홍, 맨드라미, 분꽃, 나팔꽃, 과꽃, 코스모스, 등 등의 꽃들을 심어 놓곤 우리 집 꽃밭이라고 여겼던 것 같다. 그 중에 빠지지 않았던 꽃이 해바라기다.
해바라기는 국화과에 속하고 학명은 Helianthus annuus으로써 Helianthus는 태양과 꽃의 합성어이며 annuus는 일년생이라는 뜻을 가졌다. 꽃이 해를 향한다는 뜻으로 해바라기이지만 영어의 sunflower는 태양을 닮은 꽃이라는 의미라고 한다. 높이가 2m 이상으로 자라며 줄기나 가지 끝에 노란 또는 황금색의 꽃을 피워서 꽃마다 흰색이나 회색바탕에 검은 줄이 있는 열매를 맺는다.
긴 겨울이 지나고 아지랑이 피어나는 봄이 오면 사람들은 지난해 거두어 놓았던 꽃씨를 찾아서 흙이 있는 곳에 뿌리기도 하고, 옆집과 건너 집에서 모종을 얻어다가 심기도 한다. 해바라기 모종은 어릴 때부터 줄기가 튼실해 보이고 잎이 커서 꽃밭을 건강하게 보이게 하는 장점이 있었다. 또한 다 자라면 다른 꽃들보다 키가 크다는 이유로 주로 꽃밭 뒤쪽에 자리를 정해주고 울타리 역할을 하도록 하였던 것 같다.
해바라기는 여름이 지나면서 키가 부쩍 크고, 줄기 끝에 노란색의 꽃잎을 살짝 드러낼 정도로 꽃송이가 커지는가 싶으면, 어느새 태양을 닮은 커다란 꽃이 되어 간다. 열매가 영글어 점점 무거워져서 남의 집 담 너머로 고개를 숙이게 되면 괜스레 서운한 마음이 일기도 한다. 아마도 나를 향해 웃어주지 않는다는 안타까움에서 비롯된 마음일 것이다.
아폴론을 사모하는 미천한 님프 클리티에의 소망을 안고서 해바라기는 아침 해가 떠올라 저녁에 질 때까지 태양을 향해 얼굴을 돌린다는 유래가 있지만 줄기가 굳어지고 나면 태양을 향해 얼굴을 돌릴 수가 없게 된단다. 그러므로 꽃이 해를 향하여 얼굴을 돌리고 있다는 아름다운 이야기는 우리의 마음에 있는 소망들을 담은 표현이라는 생각이 든다.
가을이 깊어 꽃밭의 다른 꽃들이 다 지고 잎의 색들이 바래갈 무렵 해바라기는 더욱 돋보이기 시작한다. 해바라기마저 그 빛을 잃을 때쯤 되면 내 키보다 더 크고 억센 줄기 끝에 매달려 있는 그 꽃을 꺽어다가 토실토실해진 씨앗을 까먹곤 하던 추억이 있다. 하지만 해바라기에 관련된 추억이 어디 꽃밭에 관한 것만 있을까.
우리의 시선을 붙들어 매기 충분한 반 고흐의 해바라기 화폭에 심취해 본 기억이라든지, 해바라기라는 이름을 가진 싱어들의 노래를 들으며 아름다운 가사에 심취하곤 했던 추억을 가지고도 있지만, 한 편의 영화 또한 빼놓을 수 없다.
영화이야기를 꺼내 놓고 보니 금새 아름다운 선율과 함께 화면을 가득채운 러시아 벌판의 해바라기 밭이 떠오른다. 그리고 그 한 복판에 소피아 로렌의 절절한 몸짓이 보인다. 그녀가 지나가는 우크라이나의 평원에는 해바라기가 끝없이 펼쳐져 있다. 스크린을 가득 메운 해바라기 숲에서 남편 안토니오의 흔적을 찾아 헤매고 있는 지오바니의 커다란 눈매가 해바라기 꽃잎으로 오버랩되어 온다.
천신만고 끝에 남편을 찾아내지만 그는 과거의 기억을 잃어버린 상태에서 소련 여인 마샤와 함께 가정을 이루고 살고 있었다. 다른 여인의 남편이 되어 있는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을 보고 돌아오는 기차에서 울부짖는 소피아 로렌의 열연이 영원히 잊혀지지 않는 장면이다. 이룰 수 없는 사랑에 몸부림치던 그녀의 절규가 어찌 그리 우리네 삶의 절망과 닮아 있던지... 나는 그 영화를 볼 때마다 그녀와 함께 눈물을 쏟아내곤 했다.
사랑하는 사람의 행복을 위해 자신의 사랑을 감추기로 하는 그녀의 선택이 우리를 감동시킨다. 한 인간을 사랑하여서 그가 가는 길을 향해 자신의 모든 촉수를 모으고 헌신하는 삶의 모습도 우리를 감동시킨다. 또한 단일한 목표를 두고 삶의 한 방향으로 정진해 나가는 사람들의 아름다운 투쟁이 우리를 감동시킨다. 주위의 잡다한 유혹들을 뿌리치고 가치 있다고 여기는 한 가지 신념을 따라 가는 외로움이 우리를 감동시킨다.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자신의 열정을 바쳐 흘리는 땀방울이 우리를 감동시킨다. 보여지는 결과는 없지만 절망하지 않고 자신의 길을 가고 있는 사람들의 오롯한 뒷모습이 우리를 감동시킨다.
꿋꿋하게 서있는 해바라기를 볼 때마다 이토록 풍요로운 감동을 내 마음속에 그려 본다. 그리고 매순간 무엇인가를 간절히 바라며 소망하는 삶을 살고 있는지를 조용히 반문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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