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플링
어느 날 문득 내 책상 서랍을 열어 본 도토리가 “커플링 잘 보관하고 있어서... 고마워... 고모!”라며 감동된 목소리로 말했다. 서랍 한 귀퉁이에 그냥 놓여있는 작은 반지를 발견한 도토리의 말이었다. 이제 겨우 8년을 넘게 살고 있는 도토리에게 있어서의 추억이란 것은 불과 몇 년간의 세월에 지나지 않을 터이지만 서랍 속에서 우연히 발견한 반지로 인해 지나간 시간에 대한 기억이 새로워졌나 보다. 난 좀 어색해졌다. 그냥 그곳에 놔두었을 뿐이었는데 그렇게 고마워하는 모습을 보니 미안한 마음이 앞선다.
몇 달 전 학교에서 돌아온 도토리가 나에게 건네준 것이 작은 반지였다. 그녀의 손에도 똑같이 생긴 반지가 들려 있었다. 무슨 반지인데 나에게 주느냐고 물었더니 단짝 친구끼리 나누어 끼는 커플링이란다. 그로부터 며칠간은 나를 볼 때마다 반지를 챙겼다. 세수할 때만 빼놓고 언제나 끼고 있어야 한단다. 왜 유독 세수할 때는 빼놓아야 한다고 생각하는지는 알 수가 없었지만 하여간 도토리의 주장은 한결같았다. 내 손가락에 반지가 끼어 있지 않으면 커플링을 잊어버렸느냐며 우리가 커플링을 하고 있는 단짝 친구 사이임을 다시 되새겨 주곤 했다. 어른의 눈으로 볼 때는 아주 조악하기 이를 데 없는 반지였지만, 도토리에게 있어서는 친하게 지내자는 또는 아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자는 의미를 가진 소중한 반지였음이 틀림없다.
그런데 얼마 후 학교에서 돌아온 도토리의 손가락에는 색다른 반지가 끼어져 있었다. 나는 정색을 하며 왜 반지가 바뀌었느냐고 물어보니까 어떤 친구가 자기에게 반지를 주면서 커플링을 하자고 했다는 것이다. 또 그로부터 얼마가 지난 후 교회에 다녀오더니 손가락에 끼고 있는 새로운 반지를 내밀며 자랑을 한다. 또 다른 어떤 친구와의 커플링이란다. 나와 나누어 낀 반지는 어디에 두었는지도 모르면서 때마다 새로운 반지에 몰두하고 있는 그녀를 보고 실없는 미소가 떠올랐다.
도토리는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서 새로운 반지를 끼고 들어오곤 했다. 그렇게 약속하고 나누어 낀 반지가 몇 개나 되는지에 대해서는 기억할 수 없다. 그 또래의 아이들이 반지놀이에 광분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유행되고 있는 놀이라고 여겨져서 그녀가 나누어 가진 수많은 커플링들의 사연에 대하여 다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녀 역시 그 반지들을 어디에 두었는지, 어디에서 잃어버렸는지, 누구와의 약속인지에 대하여 특별한 기억을 갖고 있는 것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나는 그녀에게 있어서 커플링을 나누어 가지는 그 순간은 진실이었고 최선의 선택이었을 것이라고 믿는다. 이익이나 해로움을 계산치 않은 순간이었을 것이라고 믿는다. 나는 나라서, 그 친구는 그 친구라서 모두가 도토리의 단짝 친구가 되었을 것이다.
도토리의 반지놀이는 꽤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한 사람에게만 집착하지 않고 여러 사람들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지내는 도토리를 보며, 사람들끼리 소유의 개념을 떠나 어떻게 서로 어울려 살아야 하는지를 배울 수 있었다. 그래서 오히려 고마웠다. 사람 사이에서의 집착이란 좋은 결과를 낳기보다는 악영향을 끼치는 경향이 더 많다. 나와의 관계만은 특별하다 또는 특별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사람을 소유하려는 부담을 가지고 살아갈 필요는 없는 것 같다.
밤 꽃향기는 밤 꽃향기대로, 아카시아 꽃향기는 아카시아 꽃향기대로, 라일락 꽃향기는 라일락 꽃향기대로 자신의 모습일 뿐이다. 단 한 가지 꽃향기만을 즐긴다고 하여 다른 꽃향기를 버릴 수는 없는 것처럼 어느 순간은 이 아이와 친구가 되고, 어느 순간엔 저 아이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인간관계를 확대해 간다면 언젠가는 서로 다 연결되는 우리라는 공동체가 형성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언젠가 우리는 너와 나 그리고 그가 엮어가는 다양한 삶의 형태를 받아들이고 수용할 수 있는 넓은 마음을 가질 수 있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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