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더 소중해...?
이번 토요일은 도토리의 피아노 연주회가 열리는 날이다. 자신의 첫 번째 피아노 연주회인 만큼 고모도 꼭 참석해서 축하해 주어야 한다는 통보는 몇 주 전에 받았었다. 나는 그날 다른 일정이 겹쳐있었기 때문에 참석한다는 확답을 못하고 있다가 도토리의 확인 전화를 받고서야 참석하기 곤란하다는 말을 전해 주었다. 그녀는 예상외로 차분하게 반응하면서 못 오는 이유를 정확하게 말해보라고 했다.
“오래전에 약속된 중요한 모임이 있거든...”
“고모, 그 모임에 못 가겠다고 친구들에게 말해...”
“난 그런 말 못해...”
“고모, 고모는 마음이 약하니까 마음을 강하게 먹고 말해야 돼...”
마음을 강하게 하고 거절하는 말을 하라는 것이었다. 거절하는 것이 어려운 일인지를 도토리는 이미 알고 있는 모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절해야 된다는 말을 하는 것은 곧 자신이 그 어떤 것과도 비교될 수 없는 가장 소중한 존재라는 사실을 확인받고 싶은 마음의 표현이리라.
그다음 날 저녁, 집에서 또 다른 사건이 발생하였다. 늦은 저녁에 나는 심각한 일로 친구와 전화를 하고 있었는데, 자기 엄마 방에서 내 방으로 건너온 도토리가 TV를 켜주면서 보라고 한다. 조금 있으면 뉴스 화면에 자기 아빠의 얼굴이 나올 것이란다. 나는 화면에 도토리 아빠의 얼굴이 등장하기 전이지만, 뉴스 소리가 너무 커서 TV를 껐다. 그리고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친구와 통화를 하고 거실로 나왔다. 자신의 배려를 아랑곳하지 않고 전화에만 몰두했던 나의 행동이 화근이 되었나 보다. 거실에 있어야 할 도토리가 보이지 않았다. 자신의 삐침을 눈치 채지 못하고 동생 내외와 뉴스에 관한 이야기만 나누고 있는 고모가 못내 서운했던지 잠시 후에 커다란 쪽지 한 장을 내 앞에 던져놓고 자기 방으로 훅 가버린다. 쪽지의 내용은 이랬다. ‘고모에게... 흑 흑... 나 엄청 화났어. 뉴스 본다고 해 놓고선 왜 안 봐? 그리고 내일 피아노 연주회에 안 오면 나 완전 삐칠 거야... 2008년 2월 22일’ 내용을 읽고 나니 웃음이 터져 나온다. 난 억지로 웃음을 참으면서 도토리를 불렀다.
한참 후에야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면서 도토리가 다가왔다. 나는 그녀를 안아주며 말했다.
“고모가 미안해... 친구가 슬픈 사정이 생겼다고 이야기하고 있는데... 나 혼자만 즐거울 수는 없잖아... 이해하지?”
내 마음이 약해진 틈을 타서 다시 도토리의 거래가 시작되었다.
“고모는 친구가 소중해?... 가족이 소중해?...”
고모는 늘 친구의 서열에 있는 사람들과 어울려 지낸다고 느끼고 있는 아이다운 발상의 질문이었다.
“둘 다 소중하지!”
가족의 서열에 있는 그녀가 기다리던 대답은 물론 가족이 소중하다는 답이었을 게다. 자신이 기대하고 예상했던 답이 빗나가자 잠시 머뭇거리다가 다시 질문을 한다.
“... 응... 그럼... 누가 더 소중해?...”
둘 다 소중하지만 비교해서 더 소중한 것을 선택하라는 압박으로 들렸다. 자기는 가족이 더 소중하단다. 그래서 나도 다시 대답했다.
“고모도 가족이 소중하지만... 친구에게는 슬픈 일이, 가족에게는 기쁜 일이, 갑자기 동시에 생긴다면 슬픈 일을 만난 친구와 같이 있어야겠지...”
도토리는 거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둘 다에게 슬픈 일이 생겼다면 어떻게 하겠냐고 재차 따져 묻는다. 그때는 가족과 함께 있겠다고 대답해 주었다. 그러나 그다음의 말이 뒤통수를 때린다. 가족의 연주회와 친구들과의 모임은 둘 다 기쁜 일이니까 당연히 조카의 연주회에 참석해야 한단다. 같은 점수가 매겨졌을 때에 가족에게 우선순위를 두고 있다는 것을 증명해 내라는 요구였다. 친구의 세계가 아직 확보되어 있지 못한 나이에는 가족이 제일 소중하다고 여겨지는 것이 당연하겠지만 이제 조금만 더 크면 친구 만나러 나가서 가족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지도 모르게 되는 시기가 곧 오리라. 그때가 되면 내가 도토리에게 꼭 하고 싶은 질문이 있다. “가족이 더 소중하니, 친구가 더 소중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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