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습 좀 많이 해 !
오랜만에 도토리와 카드놀이를 했다. 5대 4로 내가 졌다. 열한 살이 된 도토리는 이제 나에게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오십 대 중년인 내가 최선을 다한다고 해도 이제 막 십 대에 들어선 도토리의 정확한 기억력과 신속함을 따라잡을 수가 없다. 그녀는 빠르게 성장하고 있고, 나는 서서히 쇠퇴하고 있다. 오늘도 4대 2로 내가 지고 있는 상황이었다. 게임이 빨리 끝나는 것이 아쉬웠던지 도토리는 2점짜리 역전의 기회를 제공하면서 까지 놀이를 계속하려는 의지를 불태웠다. 결국은 자기가 이길 수 있으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나와의 게임에서 여유를 가진 그녀가 어른스럽게 느껴지기도 한다. 예전에는 내가 도토리를 배려하곤 했는데 이제는 도토리가 나를 배려해 주고 있는 것이다.
도토리가 다섯 살이 되었을 즈음의 일이다. 어린아이와 어른이 같이 즐겁게 할 수 있는 놀이가 카드놀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트럼프 카드를 가지고 같이 노는 기회를 많이 만들곤 했었다. 다행히 도토리도 하트, 클로버, 다이아몬드, 스페이드 등 네 종류의 그림이 그려져 있는 카드를 가지고 놀기를 좋아했다. 그때는 아이 수준에 맞게 변형한 세븐브리지, 뒤집어 짝 맞추기 등이 고작이었지만 그래도 진지한 자세로 게임에 임하곤 했다. 어른이 무조건 다 이기면 무슨 흥미가 있으랴 싶어서, 나는 아이가 재미를 붙일 수 있을 정도의 차이로 져주곤 했다. 내가 자주 지니까 자신이 이긴 것에 대하여 자랑스러워하며 “고모, 나 없을 때 연습 좀 많이 해!”라며 일침을 놓곤 한다. 도토리로써는 고모가 지는 것이 안타까워서 하는 소리이겠지만, 나는 그 소리를 들을 때마다 ‘언제쯤 되면 고모가 일부러 져 주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까?’라고 속으로 말하며 웃었다.
4학년이 된 도토리는 이제 그런 카드놀이 같은 것으로는 만족하지 않는다. 내게 늘 배우기만 해왔던 선생님 놀이도 수준이 달라졌다. 얼마 전부터는 도토리가 선생님이고 나는 학생이다. 영어와 수학 책들을 가방 가득 가지고 와서는 내 방에 펼쳐 놓는다. 그리고는 작은 책상, 연필, 지우개, 매직펜, 화이트보드 등을 준비하여 들고 온다. 그녀가 문제를 내면 나는 조용히 풀다가 몇 개를 틀려 준다. 그래야 그녀가 할 일이 있을 것 아니겠는가. 그녀는 답지를 보고 채점을 하고, 틀린 것을 가려낸다. 그러면 나는 잘 모르겠다고, 자세히 가르쳐 달라고, 떼를 쓰는 척한다. 그녀는 잘 모르겠다는 고모에게 열심히 설명한다. 애써 설명하는 모습이 너무 진지해서 귀엽고 예쁘다. 수업이 끝날 즈음에는 작은 수첩을 가지고 온다. 알림장으로 사용할 수첩이란다. 수첩 한 장을 펴서 그 위에 날짜가 적힌 도장도 찍어 주고, 잘했다는 스티커도 붙여 주고, 다음 시간까지 해 올 숙제도 꼼꼼히 적어 준다. 그녀가 학교에서 혹은 학원에서 받은 교육방식 그대로 나에게 가르쳐주는 것이다.
긴장이 필요한 게임에서 연습 좀 많이 하라며 나를 배려해주는 파트너를 둬서 즐겁고, 학교놀이에서도 이렇게 예쁘고 귀여운 선생님을 모시고 있어서 참 기쁘다. 그리고 이렇게 입장이 바뀐 현실이 뿌듯하기도 하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녀와의 관계에서 나의 역할이 축소되는 것 같아 허전함이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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