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 밑에 해방촌이라는 동네가 있다. 이북에서 피난민들이 내려와 산 밑에 모여 둥지를 틀고 살던 동네라 이름도 해방촌이라고 불렀다. 자유를 찾아 이남으로 내려온 피난민들이 이곳에 정착해 병원과 교회를 세우고 살면서 어려운 피난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그 가운데는 의사이셨던 외조부께서 개설하신 작은 의원도 끼어 있었다.
남산에서 내려오는 비탈길은 바로 사거리를 만나는데 그 모퉁이 중 하나에 병원이 서있었다. 병원 안쪽으로 살림집이 함께 있어서 병원으로 들어오는 입구와 집으로 들어오는 대문이 구분되어 있었다. 병원입구는 돌층대로 되어 있어 2층 같은 느낌을 주는 곳이었고, 문을 열고 들어오면 오른쪽으로는 진료실과 대기실 등이 있고, 왼쪽에는 할아버지 방이 있었다. 그 방의 창문에서 내려다보면 사거리로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다 보였다. 어렸을 때 우리 4남매는 웬만한 병은 다 그 곳 은제의원에서 치료를 받으며 자랐다. 특히 방학이 되면 외가댁에 가는 것이 우리들의 즐거운 낙이었다. 외가댁에는 먹을 것도 풍부했고, 나이 차이가 많지 않은 삼촌들과 이모들이 계셔서 무엇보다 재미있는 일들과 신나는 일들이 많이 일어나곤 했었다. 그러나 나에게는 이러한 이유들보다 더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는 놀이가 하나 더 있었는데 바로 병원 앞을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하는 일이었다.
내가 초등학교 2학년말에 우리가족은 다시 해방촌으로 이사를 했다. 그러나 가까운 곳에는 초등학교가 없어서 이태원에 있는 초등학교를 다녀야 했다. 오빠는 이태원초등학교로 전학을 했지만 잘 걸어 다닐 수 없었던 나는 집 옆에 있는 해방교회가 운영하는 구락부에서 공부하기로 했다. 교회에 다니는 대학생들이 선생님이었고 나보다 나이 많은 언니, 오빠들이 학생이었다. 남산 천막촌에 살고 있는 사람들 중에는 공장에 나가서 일하느라고 공부를 제때에 하지 못한 청소년들이 많았는데 교회에서 그들에게 배움의 기회를 마련해 주기 위해 공부를 가르쳤던 것이다. 내가 다닌 학급은 초등학교 3학년과정의 주간반이었는데 나보다 두세살 많은 아이들이 대부분이었고 20살 넘은 언니들과 사춘기를 지낸 오빠들도 있었다. 9살 난 나는 그 반에서 제일 나이 어린 학생이어서 귀여움을 많이 받았다. 언니, 오빠들이 나의 책가방을 들어주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급할 때는 나를 업고 다니기까지 했다. 그 중에 멀리서 나를 지켜보다가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나를 도와주었던 소년이 있었다. 나보다 두 살 많은 그 소년은 반 학생들 중에서는 아주 어린 편에 속했지만 용감하고 똑똑한 아이였다. 그 남자아이는 잘 웃지도 않았으며, 말이 없었고, 조용한 성격이었지만 선생님들이 믿음직스러워 하는 우리반 반장이었다.
나는 언니들과 친하게 지냈기 때문에 그에 관한 정보를 많이 입수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가 수업을 끝나고는 우리 할아버지 병원 앞을 지나서 남산으로 올라간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그의 아버지는 막노동을 하고 그의 어머니는 공장에서 일하지만 집이 너무 가난해서 아이들도 모두 일을 해야만 하는 상황이란다. 그는 공부가 하고 싶어서 아침 일찍 일어나서 일을 하고 중간에 공부하러 왔다가 다시 일하러 간다고 한다. 지금 생각해 보면 11살짜리가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의아하지만 그 시절에는 작은 공장에서 일하거나 신문 돌리는 일, 아이스케키 파는 일, 고물 주어다가 파는 일 등 아이들이 할 수 있는 일들이 아주 많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4학년이 되어서 우리 집은 해방촌을 떠나 수유리로 이사를 했고 나는 다시 일반학교로 전학을 가게 되었다. 정규과정이 아닌 구락부에서 공부했기 때문에 전학하기에 여러 가지 어려운 난관이 있었지만 결과적으로는 4학년 2학기부터 공부를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나는 같은 또래와 공부하는 일이 즐겁지 않았다. 늘 방학하기만을 기다리며 해방촌에 있는 구락부 시절을 그리워하며 지냈다. 그리고 그 남자아이가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했고 또 보고 싶었다.
어쩌다가 집안에 일이 있거나 방학이 되면 그 소년을 만날 수 있을 것 같은 기대감에 부풀어 외가댁에 가곤 했다. 그 곳에 있는 며칠 동안은 할아버지 방에서 창밖을 내다보며 혹시나 그 아이를 볼 수 있지 않을까라는 기대감으로 가슴을 두근거리곤 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 얼마나 헛된 기대감이었는지 웃음이 나오지만 그래도 그 당시에는 지나가는 사람들 중에 내가 찾는 그 소년이 있을 것만 같아서 창틀에 기대어 서서 하염없이 사거리를 내려다보곤 했던 것이다. 그리곤 몇 번의 방학과 함께 그 소년을 만나기 위한 나의 간절한 기다림은 속절없이 지나가 버렸다.
눈썹이 짙은 그 아이의 얼굴이 세월 따라 희미해져 가면서 나의 순결한 짝사랑은 그렇게 무산되고 말았지만 내가 가진 장애가 내 사랑의 방식을 간섭할 수 없었던 유일한 사랑이 나의 짝사랑이었음은 분명하다. 그래서 더욱 순결한 짝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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