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꿈을 심어주시던 삼촌이 돌아가신 그 여름방학이 지나고 나서야 학교를 다닐 수 있게 되었다. 아버지와 그 당시 교육자셨던 조목사님의 노력으로 우여곡절 끝에 우이초등학교로 전학을 하게 된 것이다. 학교생활은 너무 힘들었다. 아버지의 출근길에 매일 업혀 다녔지만 아버지와 시간이 맞지 않는 날의 등교시간에는 오빠가 나를 업고, 남동생은 내 가방을 들고 버스정류장까지 가야만 했다. 오빠는 중학생이었고, 남동생은 초등학교 1학년이었으니 지금 생각해도 참 눈물겨운 풍경이 아닐 수 없다. 다른 아이들은 걸어 다니는 거리였는데 잘 걷지 못하는 나는 그 두 정거장을 버스를 타고 다녔다. 그 당시 만원버스를 타는 것도 어린 나에겐 쉽지 않은 도전이었지만 그렇다고 학교를 그만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나도 다른 아이들처럼 공부를 해야 하고, 진학을 해야 하고, 세상에 나가 그들과 같은 조건으로 겨루어야 하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5학년이 되던 해 5월 6일에 소아마비수술을 받게 되었다. 나의 아버지는 장애를 가진 딸을 위해 언제나 최선의 선택을 해주셨다. 아주 어릴 때는 가벼운 종이로 공을 만들어 하루에 수십 번씩 왼쪽 발로 차는 운동을 하라고 하셨고, 발을 사용해야 하는 오르간을 사주시며 왼쪽 발로 페달을 밟아 다리 힘을 키우라고 하셨던 아버지가 이제 수술을 결정하신 것이다. 나중에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 자신이 해 줄 수 있는 마지막 선택이라고 여기셨나보다. 최후의 방법이라 여기면서 11살의 어린 딸을 수술실로 보내셨을 것이다. 후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수술비와 입원비와 치료비는 그 당시 작은 집 한 채 가격이었단다. 그리고 그로부터 10여 년 후에 소아마비 걸린 많은 사람들이 수술을 받기 시작했다고 한다. 내 아버지의 생각은 옳았고, 선구자적이기까지 했다.
수술을 한 후에도 계속 물리치료를 받으러 병원을 오가야 했다. 석고로 기브스를 한 왼쪽 다리는 구부리지도 못하는데 그러한 나를 업고 수유리에서 명동성모병원까지 버스로 이동하며 치료를 받으러 다니셨던 엄마... 엄마의 허리는 그때 다 무너져 내렸을 것이다. 엄마... 나의 엄마!!!... 엄마와 나는 많은 사람들의 눈에 띄었을 것이고, 많은 관심을 받았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많은 말들을 해 주었을 것이다. 난 장애인이기 때문에 뭔가 그럴싸한 훌륭한 일을 해야 할 것만 같았다. 그것은 공부를 잘해서 의사가 되어 나 같은 아이들을 고쳐주는 일을 하는 것이라고 여기고 막연히 의사가 되어야겠다고 그 어느 날의 일기에 기록했다. 이 희망 또한 치명적인 사건으로 남아 내 인생에 무지막지한 영향을 끼친 결과가 되고 말았지만...
그 당시 나는 또 한 번 좋은 선생님을 만났다. 그분의 이름은 ‘이기주’였다. 이기주의를 연상케 하는 이름이지만 아주 여리고 착하게 생긴 여자 선생님이 담임선생님이셨는데 몇몇의 친구들을 데리고 병실을 찾아주셨다. 나는 그 선생님 덕분에 아이들과 잘 어울려 지낼 수 있었던 것 같다. 황소눈깔이라고 놀리며 내 걸음을 흉내 내면서 뒤 쫒아오는 아이들도 있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가방을 들어주는 좋은 친구들도 있었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그 당시 서울시장의 이름과 같다고 기억되는 백현옥이라는 여자아이가 내 가방을 자주 들어주곤 했다. 그녀는 키가 크고 머리도 길고 다정한 언니 같았다. 곱슬거리는 머리카락을 양 갈래로 길게 땋고 예쁘게 보조개가 들어가는 웃음을 가진 그 아이가 가끔 보고 싶었지만 만날 기회는 없었다.
초등학교 6년의 기간동안 1학년과 6학년의 기간만 제대로 공부를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전학이 안 되어서 4학년 출석시간도 많이 모자랐고, 수술과 치료 때문에 5학년도 많은 날 학교를 가지 못했고, 6학년 때 도봉산 근처로 이사를 하게 되어 버스를 두 번 타고 학교를 열심히 다녔다. 그 당시는 시험으로 결정되는 중학교입학제도였는데 장애학생들을 잘 받아준다고 소문난 학교를 찾아가야 했다. 그리고 장애를 가진 나는 성적에 맞추어 학교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거리에 맞춰야만 했다. 부모님은 내가 먼 곳까지 통학하기 힘들다고 여겨 집에서 가장 가까운 중학교에 보내려고 하셨다. 어는 학교에서든 열심히 공부하면 우수한 성적을 얻을 수 있다는 아버지의 생각이셨지만 담임선생님의 반대로 오빠의 학교 근처에 있는 동덕여중에 원서를 넣었다. 결국은 또 오빠의 도움을 받아 중학교를 다니게 되고 말았다. 등하교시간, 체육시간, 무용시간 등을 제외하면 중학교 생활은 즐거웠다. 지금까지 연락하고 사는 좋은 친구들도 만났고, 좋은 선생님 덕분에 첫 소풍도 갈 수 있었다.
밝고 명랑하다는 선생님들의 칭찬 속에서 평범한 사춘기를 맞으며, 의사가 되어야 한다는 머리 속의 생각과는 별도로 바이올린을 켜는 꿈을 자주 꿀 때가 있었다. 교회성가대와 학교합창단에서 노래를 불렀는데 합주반이 너무 멋져보였다. 나도 악기를 다루고 싶었다. 특히 첼로의 저음이 너무 좋았다. 지금은 아주 유명한 첼리스트가 된 어릴 적 그 친구에게 물었더니, 첼로는 너무 무거워서 내가 들고 다니기는 힘들 것이라고 하면서 바이얼린을 추천해 주었다. 하지만 너무 가난(?)해서 레슨비를 마련할 수가 없었다. 당연히 바이올리스트의 꿈은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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